넷플릭스 <제니퍼는 무슨 짓을 했는가>를 보고.
제니퍼가 한 일을 봤다. 십여 년 전쯤 벌어진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 이라기보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가까운 - 작품이다.
총평을 하자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넷플릭스 범죄물이었다. 조금 더 세세하게 말을 더하자면 스토리텔링에 있어 완성도 있는 편이 아니다. 두서없기도 하고, 가장 핵심이 되는 - 제니퍼가 사실은 **한 것이었다는 -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만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한 빌드업을 너무 오래 끌어서 조금 김이 빠지는 감이 있다.
가장 아쉬운 것은, 범죄 피해자 연락관인 데버라 글래딩의 증언이 사용되다 만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피해자이자 (당 시점에) 유일한 목격자였던 제니퍼가 유력한 용의자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다. 다큐 초반에 제니퍼는 '완벽하게' 피해자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이때 연락관의 인터뷰가 사용되어 피해자성이 도드라진다.
다만 전환되고 나서는 제니퍼의 '피해자성'과 관련해 특별한 말이 나오지 않는 점이 찜찜하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정황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왜 그때부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지 등 질문이 생기지만 이에 대한 답은 없다. 연락관은 '이 문제는 흑백으로 나눌 수 없다'고만 말한 뒤 빠진다. 어느새 제니퍼는 끔찍하고 극악무도한 패륜적인 용의자가 되어있다.
많은 구독자들이 실망스럽게 여긴 부분이자 내가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부분은 바로 이 전환점이다. 제니퍼가 용의자로 전환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제니퍼가 부모님의 압박이 너무 싫어 좋은 대학에 간 척 이중적인 생활을 4년이나 해왔음이 진술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다큐에서 처음으로 밝혀지고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형사의 인터뷰가 나온다. 'What the fuck?' 이라는 다소 자극적인(ㅋㅋ) 언행이 나온다. 아마 시청자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넣은 장면인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여기서 가장 큰 인지부조화를 느꼈다.
4년간 명문대생으로 가장하고 살아옴 = 그런데 그 이유가 Asian Parents의 심각한 책망과 기대, 압박 때문임. 나는 이 동기와 행동이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나) 아주 불가능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니퍼는 거짓 진술을 했고, 그렇기에 그가 실제로 부모의 죽음에 책임이 있음이 밝혀졌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부모의 압박'에 의한 4년 간의 위장 생활에서 부모의 압박에 의한 '4년 간의 위장 생활'이 집중되었다는 점이,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그의 진술의 진실성이 곧바로 부인되고 용의자로 상정되었다는 게 흥미롭고 조금 무섭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제니퍼의 위장 생활과 부모님 살해 사주의 관련성은 제니퍼의 '원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제니퍼가 에이전트만큼이나 훌륭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물론 영화에서는 제니퍼의 친구들 (똑같이 베트남에서 살던 이주민들)의 인터뷰를 삽입하고, 그런 압박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사실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제니퍼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인물들의 인터뷰가 충분히 나오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충격은 뭐랄까, 나 빼고 모두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외로움이자 공포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나는 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한 10월에도 느꼈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이스라엘보단 하마스에 비판적인 여론이 컸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게 10월 전쟁의 시작은 하마스의 맹공이었고, 이스라엘의 공격은 하마스의 선공에 대한 보복이라는 나름 정당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명분을 이용해 미친 듯이 공격을 하는 게 지금의 인종 학살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공격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거고, 다만 그때의 내가 그랬듯 말로 그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이것이 전쟁이다'를 예시로 보란 듯 보여주는 모든 잔혹한 학살이 너무 괴로웠는데, 그것에 반하는 논조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던 나는 참 그 괴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위로를 받았던 게 브라질의 언론(이 운영하는 SNS 계정)과 거기에 달린 브라질 현지인들의 댓글이었다. 브라질은 드물게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개진해 온 국가에 해당했다.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의 규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런 글을 보며 힘을 얻었던 이유는,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는 다수 존재한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의아했던 건, 하마스의 첫 공습(rave 파티)에 사망했던 희생자들 중엔 브라질 국적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마스의 공습에 무고한 사람들이 - 과연 무고하지 않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느냐는 잠시 생각 뒤편에 넘기더라도 - 죽는 게 맞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쟁에 반대한 것도 그들이었다.
다만 이들은 이스라엘의 잔혹함이 결국 더 큰 전쟁을 불러 일으킬 것임을 -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 먼저 예견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들은 계속해서 밝혀지는 브라질 국적 희생자들의 신상이 공개되어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한국과 다른 브라질의 언론 보도 방향과 현지 여론이 너무 이해가 안 되고 기이하면서, 동시에 흥미롭기도 해서, 한때 전부 스크랩해서 한국과 비교해 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어휴, 근데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고 사건의 전개는 왜이렇게 미세한 것 하나에도 쉽게 뒤집히는지. 내가 경험한 최근의 언론과 관련한 것들 중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내가 브라질의 여론과 무조건 동일시 하냐, 그건 또 아니다. 최근에 브라질 여론과 너무나 큰 괴리감을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Tio Paulo(파울루 삼촌)'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병환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생활을 하던 한 노년의 남성(파울루)이 있었고, 그를 돌보던 조카(에리카)가 그를 돌보아 왔다. 어느날 에리카는 휠체어에 파울루를 태우고 한 쇼핑 센터에 있는 은행에 방문한다. 17,000 헤알 (현재 한화로 약 450만 원 상당)을 인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노인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고, 이에 이상함을 느낀 직원은 에리카와 파울루의 모습을 촬영했다. 파울루는 은행에 도착한 시점에 사망한 상태였음이 확인되었고, 현재 브라질에서는 에리카의 살해 등 범죄 혐의 조사에 관해 자와자와하는 상황이다.
처음 이 기사를 보고는 당연히 돈을 노린 범죄가 분명하다 생각하고 혀를 끌끌 찼다. 댓글창을 열었다.
거긴 시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많은 댓글은 에리카를 향한 동정표를 던지고 있었다. 에리카가 얼마나 놀랐겠느냐며, 자기가 돌보던 가족이 갑작스레 사망해 황망할텐데 조사까지 받고 있으니 - 에리카는 지금까지 구속 상태다 - 얼마나 힘들겠냐는 여론이 태반이었다! 무슨 소리야 사람이 죽은 게 누가 봐도 티가 나는데 그걸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모르냐고~~
여전히 사건은 진행 중이다. 초반에는 파울루의 사망 시점(집을 떠나면서였는지, 쇼핑 센터로 이동하면서였는지, 아니면 은행 도착 후였는지 등)과 에리카가 파울루의 사망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는지(지적인 장애가 있어 파울루의 사망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변호가 있었음)가 핵심이었다. 지금은 여기에 '살해 혐의'까지 추가되어 계속 조사가 진행 중이다.
(관련한 브라질 뉴스 포털 G1의 최신 기사)
정말 눈 딱 감고 한 번 더 댓글창을 열어 봤는데 지금도 에리카 옹호 여론이 강세다. 지금은 이 사건이 '생계형 범죄'로 프레이밍되는 것 같다. 계속 댓글에서 포르쉐 포르쉐 거리는데 (ex: '에리카에게 포르쉐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강도 높은 수사는 없었을 것' 등) 아마 그새 부유층 관련 사건이 또 터졌고 그 사건은 '부실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여론이 강한 것 같다. 모르겠다. 나는 이제 이 사건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 또 예의 그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정말 브라질 여론을 위해 마지막 항변을 하자면, 브라질은 한국보다도 훨씬 더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고, 그렇기에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해서는 한국이 보기에 다소 급진적인 의견을 가진 국가이기도 하다. 아마 이 '파울루 삼촌' 사건이 브라질 국민들의 어떤 역린을 건든 듯한데... 모르겠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