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흑기사의 베일

가려져야 하는 진실의 아이러니

by 로마노

[작가의 말]
진실이라는 것은 정말 선의의 가치일까요? 때론 진실이 왜곡되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때가 있다는 생각. 한 번쯤은 해보신 적 없으실까요?

<흑기사의 베일>

[승진 발표일. 1주 전]

"그래서... 승진 추천자는 누구라고?..."

이 전무의 집무실.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은 회색의 구름에 휩싸여 푸른빛이 실종된 상태였다. 회의는 그리 길지 않았다. 신 부장과 사 부장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 인사 한 뒤, 가녀린 소녀의 손길처럼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직원들은 이미 지난주 회의를 통해 눈치채고 있었다. 부장 두 명이 전무의 집무실로 들어간 이유를.

[승진 발표일. 2주 전]

이 전무 주관으로 전략재무본부 전 직원 참여 회의가 진행되었다.

"AI를 도입하여 업무 효율화에 성과를 내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희도 이런 기류에 따라갈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성과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RPA를 통해 자동화에 성공한 회사, AI를 적용하여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고 있는 회사들은 모두 범용 시스템에 기반하여 업무를 하고 있는 자산 규모 상위 회사들입니다. 이런 회사들을 타기팅하여 자동화 솔루션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커스터마이징 없이도 바로 적용할 수 있고 성과도 빠르게 나타나는 것이죠.
저희 회사는 시스템 도입을 위한 투자비뿐만 아니라 매년 수억 원의 유지보수비용을 감당할 체력이 없습니다. 경영 손익, 투자 예산, 비용 예산, 원가 분석 모두 수천. 수만 행 단위로 구성된 엑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 엑셀을 선배님들부터 지금까지 한 땀씩 다듬고 수정해서 웬만한 범용 시스템에 버금가는 수준까지 만들어온 거고요. 회사 실정에 대한 이해 없이 과제부터 만드는 것은 보여주기식 업무로 전락할지 모릅니다."
"도 과장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히려 회사가 더 뒤처지게 될 것 같은데요? 이런 트렌드에 맞춰서 일하는 방식 자체를 전부 바꿔야죠."
"나 과장님. 트렌드에 따라가지 말자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남의 기준에서 보지 말고 우리 스스로부터 객관적으로 봐야 된다는 의미예요. 대형 회사들이 1개월 걸렸다고 해서 우리도 1개월 걸린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커스터마이징에 따른 개발비용도 고려해야 해요."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대안을 주세요. 일단 시작부터 해보고 그때 그때 하나씩 해결하면 되지 않나요? 너무 시작도 하기 전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부딪혀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같이 집단지성을 발휘하면 당장은 고통스러워도 결국 다 해결됩니다."
"같이요? 나 과장님. 제 말은..."
"그만!"

이 전무가 회의를 중단시켰다.

"조금 회의가 과열된 거 같네요... 정리를 한 번 해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AI와 사무 자동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전략재무본부도 퇴보하지 않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이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전략을 담당하는 나 과장과 예산을 담당하는 도 과장이 각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슈 사항을 잘 설명해 줬습니다. 상호 간에 업무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우리 회사만의 접점을 찾아가 봤으면 하네요."
"저도 전무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기술 트렌드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회사의 업무 방식. 양자 간의 충돌 지점에서 어떤 갈등 요소들이 나타나는지를 잘 관찰해서 절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사 부장이 이 전무의 말을 거들었다.

"사 부장님, 재무회계파트에서도 해볼 만한 과제가 많이 있을 것 같은데 도움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원가 체계 변경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하셨는데 연계된 과제들도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무님. 오늘 직원들이 다소 열정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회의를 주관한 전략기획파트 입장에서 자료 준비와 소통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부서장으로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신 부장이 앉은 채로 이 전무와 본부 직원들을 향해 가볍게 사과의 목례를 건넸다. 회의실의 뜨거웠던 열기는 금세 싸늘하게 식었다. 이렇게 중요한 회의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는 게 레알이냐고 직원들의 눈동자는 바쁘게 굴러갔지만, 침묵의 연주를 깨지는 않았다. 이 전무가 마무리 멘트를 이어갔다.

"네. 의견 없으면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아. 올해 승진 대상자들을 인사노무본부에 전달해야 하는데... 제 의도는 명확합니다. 전략기획파트와 재무회계파트의 부장들이 의견을 모아서 정리해 오길 바라요. 저는 여기 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부 내에 다양한 사정들이 엮여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할 예정이니 직원 여러분들은 그렇게 알아주세요."

회의 종료 후, 회사 건물 밖 담배 연기에 휩싸인 어느 구석 공간에서 직원들이 몰래 수군거렸다.

"아까 봤지? 나 과장이랑 도 과장. 기싸움 장난 아니던데?"
"그러니까 말이야. 둘 다 올해 팀장 승진 대상이니까. 오 팀장님 해외주재원 발령 난 거 기정사실이니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된다고."
"근데 본부장님이 부장님들한테 결정을 던지셨잖아."
"그러니까. 역시 본부장님 그전 회사에서도 덕장으로 소문이 자자하셨는데 이유를 알겠더라니까."
"근데 재무회계파트는 승진 대상자가 없으니까 결국 전략기획파트 집안싸움이 되는 거네. 신 부장님과 사 부장님이 과연 누구를 추천할까?"
"나 과장은 추진력 좋고, 전사적으로 업무 관계 좋고... 그런데 아직 부서에 온 지 2년 차라 업무 Depth 측면에서는 여전히 의문이지. 자료 요청식으로 대응하는 게 다반사잖아. 도 과장은 재무파트부터 전략파트까지 입사 후 우리 본부를 떠난 적이 없으니까... 근데 너무 많이 알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봐주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둘 다 스타일이 너무 달라."
"신 부장님이 누구를 추천할지 관건이겠네요."
"그렇지. 집안싸움인데 사 부장님이 시누이처럼 나서긴 좀 그렇지."

[승진 발표일. 오후 어느 시각]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승진자의 자리에 몰려들었다. 나 과장은 쏟아지는 방문에 분주했다. 축하 인사를 하러 온 직원들은 파티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도 과장의 눈치를 보느라 초고속으로 인사를 마치고 부리나케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나 과장도 뛸 듯이 기뻤지만 애써 표정은 담담한 듯 유지하려고 했다. 새삼 영화배우들이 대단하구나 생각했다.

나 과장은 복도에서 사 부장과 마주쳤다. 사 부장은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스캐닝을 마친 뒤 나 과장에게 다가갔다.

"나 팀장. 승진 축하해~"
"부장님. 감사합니다. 아직 발령일까지 이주일 남았습니다."
"그래. 전무님 하고 회의하는데 아주 열띤 토론 과정이 있었지."
"네 안 그래도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내가 나 팀장 밀어주려고 아주 적극적으로 얘기 좀 했어. 의외로 신 부장이 우유부단한 측면이 있더라니까? 그런 모습 또 처음 봤지 뭐야. 그... 뭐지? '깜놀'? 하하! 깜놀했어. 나 팀장한테 내가 도와줬다고 어필하려고 하는 거 절대 아니다. 오해하지 마."
"부장님! 많이 도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냐. 아냐. 이런 인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하하! 아무튼 축하하고 밥이나 한 번 먹자고. 앞으로도 우리 재무회계파트도 잘 도와줘. 나 팀장. 파이팅!"
"감사합니다. 파이팅!"

나 과장은 자신을 지지해 주는 흑기사 같은 존재가 부장들 중에서도 있다는 사실이 그저 얼떨떨했다.

자리로 돌아온 나 과장에게 도 과장도 다가와서 승진 축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시력 2.0 이상은 되어야 보일 것만 같은 크기에 빼곡하게 채워진 숫자들. 고대의 경전을 보는 듯 낯설기 만한 함수와 연산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수식들. 두 개의 업무 모니터 앞에 마주한 도 과장은 안구건조증에 충혈된 눈을 달래기 위해 인공눈물 캡을 개봉한 뒤 두 눈에 쏟아부었다.

[승진 발표일. 저녁]

"자! 우리 모두 승진한 나 팀장님을 위해 짠!"

전략기획파트에서 나 과장의 승진을 축하하기 위한 회식이 열렸다. 도 과장은 집에 아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신 부장을 비롯하여 직원들은 술잔이 비워질 때마다 바로 소맥으로 잔을 채워나갔다. 회식은 전략기획파트의 고 대리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팀장님! 내일 바로 오 팀장님 자리로 물건 옮기겠습니다."
"고 대리. 천천히 해. 아직 3일 남았어."
"3일이라도 곧장 해버려야죠. 그리고 부장님. 매번 회식 때마다 나 팀장님 흑기사로 쓰셨잖아요! 오늘은 나 팀장님 승진 축하하는 날이니까 무조건 부장님 다 드시는 거예요!"
"알았어. 고 대리. 뭐 길에서 자는 것도 나쁘진 않아! 입만 돌아가겠지!"
"에이. 또 마음 약해지게... 김 사원! 저기 길에 이불 좀 깔아드려라."
"알겠습니다. 예산 절감을 위해 '다있엉' 이불로 준비하겠습니다."
"뭐야?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신 부장이 결제를 마쳤다. 직원들은 부장에게 인사한 뒤, 각자 갈 길을 걸어갔다. 나 과장도 집으로 가려고 하던 찰나에 신 부장이 불렀다.

"나 팀장. 우리 여기 앞에서 흑맥주 한잔씩만 할까?"

나 과장은 집으로 곧장 가고 싶었지만, 승진을 했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역할 차원에서 이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네. 가시죠."

그들의 잔에 흑맥주가 가득 채워졌다. 흑맥주의 링이 맥주잔 끝까지 채워질 때 즘, 나 과장은 불현듯 자리에 없던 도 과장이 떠올랐다.

"나 팀장... 갑자기 나 옛날 일이 생각난다."
"어떤 기억 말씀이십니까?"
"예전에... 왜 상구 있잖아."
"상구라면... 5년 전에 퇴사한 그 김상구 대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혼자 일하고 있을 때 상구가 후임으로 왔을 때 너무 이뻐 보였지. 그래서 퇴근할 때도 태워달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출장 갔다 올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데 그때도 상구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와 달라고 했었지..."
"아. 그런 일이. 상구 대리에게 애착이 깊으셨던 모양입니다."
"근데 그 자식이 나를 감사부서에 신고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상구가 출장 가서 고객사 프레젠테이션 펑크 낸 거 내가 다 메꿔줬는데. 상구 그 녀석 술 먹고 늦잠 잘 때 내가 고객사 다 돌았어. 그런데 그 녀석은 퇴근 후에 자기 보고 데리러 오게 했다고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신고했잖아. 그때 참 나 자멸감 같은 걸 느꼈지. 내가 생각했던 거랑 참 다르더라."
"아. 네. 전 그때 전략재무본부 소속이 아니었는지라. 그런 일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애착이 컸던 만큼 실망도 크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 뭐 이미 지난 얘기야. 직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나는 조금 더 낭만적인 관계를 꿈꾸나 봐. 그래도 내 잘못된 행동은 인정해야지. 그렇지만 배신감이 드는 것도 솔직히 사실이야.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은 이제 나 과장이 팀장이니까. 나와 같이 전략기획파트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직책 보임자니까 하는 말이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전무님이랑 승진자 대상 협의하는데... 전무님이 또 생각이 많이 다르시더라고. 내가 정말 진심을 다해서 얘기했어. 팀장 적임자는 나 과장이라고 말이지. 전무님도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생각은 또 다르시더라고."
"아. 그렇습니까?"
"그래. 전무님은 또 전무님만의 생각이 있더라니까? 그러니까 임원이 된 거지. 자기 컬러가 명확하지 않으면 전무 자리까지 올라가기 힘들어. 하여튼 내 의도 대로 나 과장이 팀장이 돼서 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추천해서 된 거 아니다? 나 과장이 그만큼 업무에 프로페셔널하게 접근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임해왔기 때문에 승진이 된 거야. 알았지?"
"네. 그래도 부장님. 승진할 수 있게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또 무슨 그런 말을. 그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나 과장이 잘했어. 그 대가로 승진이라는 선물 받은 거야. 알겠지? 그러니까 이제 잘하자! 그리고 앞으로도 술자리에서 내 흑기사 역할 잘해주고?"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 과장은 흑맥주 잔을 손으로 꽉 눌러 쥐었다. 흑맥주 한 잔을 모두 들이켜고 나 과장과 신 부장은 헤어졌다. 집으로 들어온 나 과장은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 컴컴한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흑기사... 흑기사...'

[5년 전]

"오늘 선배들과의 간담회가 있습니다. 다들 지정된 선배들과 연락해서 점심시간을 가질게요. 식사는 인사노무본부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당해 진급했던 나 과장은 대리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서로 다른 부서의 대리 직원 1명과 과장 직원 1명이 각각 멘토와 멘티가 되어 업무 공감대를 형성하는 나 과장의 멘토링 프로그램이었다. 나 과장은 진정한 멘토링 프로그램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멘토가 누구인지 멘티들의 부서장들에게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고, 사장은 이를 흔쾌히 승인하였다.

"좋은 생각이야! 멘토가 누구인지 부서장들이 알아버리면 멘토들이 형식적인 조언들 밖에 해줄 수 없단 말이지. 나 과장의 생각대로 진행시켜! 어떤 부서장들도 이의 달지 마! 그리고 멘토들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와 생각들을 가감 없이 멘티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이 멘토링의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거야!"

그렇게 나 과장의 주도하에 멘토링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멘토링 명단*
...
인사노무본부 나정수 과장 - 전략재무본부 김상구 대리
...

[승진 발령일, 아침]

나 팀장은 매일 회사 앞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서 테이크아웃하여 가지고 오는데 오늘은 특별히 두 잔을 가지고 왔다.

"나 팀장. 오늘부터 파이팅 해보자고."
"네 부장님. 어깨가 무겁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 오늘 사장님께 'AI를 활용한 사무 자동화 도입 계획' 보고 하는 거 있지? 그거 나 팀장이 메일로 사장님께 보고 좀 해줘."
"아? 그건 부장님께서 정리 중이셨던 자료인데..."
"아 그래도 내용은 나 팀장이 잘 아니까. 오늘 아침에 찾으시더라고. 바로 메일로 보고하면 돼."
"네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전무님도 참조로 해서 보내야 되겠죠?"
"아 그래 당연하지. 사장님께 파이팅 하겠다고 감사 인사도 넣고."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신 부장의 전화기 디스플레이 화면에 2번 번호가 찍혔다.

"네. 전무님. 전화받았습니다."
"신 부장! 너 뭐 하는 녀석이야!"
"네? 전무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사무 자동화 메일 말이야! 내가 회계법인한테 제안서 받기 전까지 사장님께 보고하지 마라고 했어? 안 했어!"
"아. 메일 보낸 거 바로 회수하겠습니다. 나 과장? 아니 나 팀장! 메일 보낸 거 당장 회수해."
"부장님. 사장님 벌써 메일 다 읽으셨습니다. 어? 사장님께서 지금 바로 직접 대면 보고 해 달라고 답변 오셨습니다."
"뭐? 전무님... 사장님께서 집무실로 올라오라고 하시는데요..."
"뭐라고? 왜 너는 내가 지시하지도 않은 일을 니 맘대로 하는 거야!"
"아. 제가 챙기고 있었는데 나 팀장이 오늘 사장님께 승진 신고 하려고 준비하고 있길래... 제가 홀딩하라고 했는데 나 팀장이 바로 메일을 발송..."
"뭐? 진짜 답답한 녀석들이네. 끊어! 니들끼리 사장님께 보고 끝내!"

초조해진 신 부장과 나 팀장은 불안한 발걸음을 이끌고 사장님 집무실로 들어갔다. 사장의 집요한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신 부장은 말했다.

"나 팀장? 사장님께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 부탁해."
"나 팀장? 분석한 거 첨부로 넣으라고 했는데 깜빡했나 보네."
"나 팀장? 이거 페이지 번호 안 맞네. 잘 좀 챙기지 그랬어."

사장 보고를 마친 신 부장과 나 팀장은 자리로 돌아왔다.

"나 팀장. 사장님 보고 힘들지? 이게 보통 자리가 아니란 말이야."
"네. 어휴. 정말 힘드네요."
"그래. 그러니 나는 얼마나 힘들었겠어. 직원들이 잘 몰라. 앞으로 잘하자."
"네. 알겠습니다."

나 팀장은 속에서 용암처럼 일렁거리는 분노와 쿵쾅대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나 팀장의 모니터에는 'AI와 사무 자동화 관련 추진 계획' 보고서 표지가 켜져 있었다. 키보드 위에 손가락만 얹어둔 채 생각했다.

'신 부장... 이제 보니 이런 식으로 일하고 있었네... 그때 정말 보내버렸어야 되는데... 뒷배가 든든할 줄은... 후... 그래도 승진하도록 밀어줬으니까. 흑기사 역할 해줬으니까 이번은 참자. 욱 하지 말자. 내가 뒤집어쓰지 뭐.'

나 팀장은 책상 위에 식어버린 에스프레소 두 잔을 혼자서 들이키고 보고서를 수정했다.

[승진 발표일. 1주 전]

"그래서... 승진 추천자는 누구라고?... 신 부장?"
"네 전무님. 아무래도 전략기획파트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적임자는... 올해는 M&A 같은 굵직한 이슈들도 대응해야 하니 전문성이 강한 도 과장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뭐? 이 사람 논리가 참... 아니 신 부장. 자네는 전문성이 없나?"
"네? 전무님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자네도 전문성 가지고 있지 않냐고. 왜 꼭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파트에 둘씩이나 필요해?"
"아. 물론 그렇긴 한데. 그래도 오랜 경력자인 도 과장이..."
"신 부장. 나랑 대화가 잘 안 되는 거 같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바로 그때, 숨죽이고 있던 사 부장이 입을 열었다.

"전무님. 제 생각에는 도 과장도 우수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 과장이 이번에 승진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 사 부장 생각도 그렇지? 나 과장으로 해. 신 부장 불만 있나?"
"네? 아... 불만 없습니다. 나 과장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결정해서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상사 의도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런 마인드로 어떻게 회사의 전략을 수립하겠다는 건지... 됐어! 다들 나가 봐!"

[승진 발표일. 3주 전]

"또 합계가 안 맞다고?"

원가 체계 변경 이후 사 부장은 결산 업무에 차질이 생겨 곯머리를 앓고 있었다. 원인 파악을 위해 시스템 업체와 비공식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들어왔다.

'전무님 아시면 크게 노하 실 텐데... 문제없다고 보고 드려놨건만... 다들 성공한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내부회계고도화 용역이 있었지. 여기에 원가 에러 잡는 것까지 비용 태워야겠다...'

그때, 사 부장은 책상 위 붙어 있는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했다. 포스트잇을 떼어 자리에서 일어나 쓰인 메모를 입으로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경제성 검토 자료 중 잔존가치 재측정 필요.
무위험수익률 고려 시 IRR(내부 수익률) 목표 미달.
내부회계고도화 투자예산 증액 불가.'

"불가... 불가..."

사 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누가 내 자리에 이 메모지 붙여 놨지?"
"아 방금 전에 도 과장이 왔다 갔습니다."
"아. 그래...? 도 과장이 쓴 거구나. 맞네. 필체 보니까 맞네. 여전하네."

사 부장은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뿐히 자리에 앉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포스트잇을 잽싸게 콩벌레처럼 구겨버린 뒤 휴지통 속으로 집어던졌다.

'유도리 없는 자식... 사원 때부터 키워놨더니...'

[승진 발령일, 오후]

"전무님. 김 비서입니다. 사장님께서 전화 연결 찾으십니다."
"네. 연결해 주세요."
"이 전무. 최 사장입니다. 내일 회장님 업무 보고에 조직 문화 관련 내용을 같이 포함시키라고 하는데 뭐 좋은 실적 있어요?"
"네 사장님. 제가 미리 확인해 보니 회장님께서 지배 구조에 관심이 많으시고 특히 여성 리더 비율을 집중적으로 보고 계시다고 합니다."
"아. 이번에 전략재무본부는 인원 채웠잖아요?"
"네. 저희는 문제없습니다."
"역시 미리 대처하신다니까. 선견지명이 탁월하세요. 역시 전무님이 제 흑기사이십니다. 오늘 저녁에 와인 한 잔 할까요?"
"네. 좋습니다. 사장님!"

이 전무의 집무실.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은 어느새 검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