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지독하다. 그래서 우주는 더욱 아름답다.
[작가의 말]
프로젝트 헤일메리 영화가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아래는 '헤일메리' 키워드를 로마노식으로 변주한 개봉 기념 헌정작입니다.
<해일과 매리>
"매리. 너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 해결해 줄 사람. 일주일 뒤에 파견 발령 날 거니까 준비해."
"제가요? 부장님. 저 이제 프로젝트 끝난 지 2주도 안 지났어요.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불확실성도 너무 크고 천지상사의 생존이 걸린 일이에요. 다른 팀장님들도 있고 과장들도 있는데 왜 저한테..."
"온실의 화초들이 이 태풍을 이겨낼 수 있겠니?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정규 업무로 보직 변경할 거야. 더 이상 프로젝트성 업무는 없어. 전무님께도 그 정도의 보상은 필요하다고 인지하고 계셔. 오케이?"
"후... 그래도... 황 부장님...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점심시간 다 됐네. 점심 같이 먹자. 돼지국밥? 추어탕?"
"아닙니다. 부장님. 저는 가로수길 따라 좀 걸어야겠어요."
점심시간, 천지상사 직원들은 왁자지껄 소란스럽게도 회사 정문을 화들짝 열고는 각자 식당으로 향해 달려갔다. 고민이 끼어들 틈새도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들. 경력 사원으로 입사한 매리에게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들 같았다. 매리는 또다시 누구도 풀어보지 못한 미지의 과제 앞에 섰다. 옆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걸어가야만 했다. 지금 밟고 있는 가로수길처럼.
가로수길을 걷다 매리가 자주 가는 헤일메리 호프집이 보였다.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면 진하게 맥주 한 잔 하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발걸음을 회사로 돌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기도 전, 매리는 자리로 돌아와 프로젝트와 관련된 파일들이 모아진 폴더를 열었다. 뒤죽박죽 질서 없이 짜인 파일 제목들을 매리가 선호하는 인덱스 양식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 후 프로젝트의 시계열적인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매리가 좋아하는 볼펜을 손에 쥐고선 A4 사이즈 빈 종이를 책상에 올려놓은 뒤 화살표와 도형들을 빽빽하게 채워나갔다. 프로젝트를 한 장의 이미지로 머릿속에 각인시킨 후 앞으로 봉착하게 될 주요 이슈들을 리스트업 한 뒤, 이사회 승인 사항과 공시 의무 사항 등 법적 기준들을 속도감 있게 정리해 나갔다. 어느새 저녁이 밀려왔다. 다들 매리에게는 퇴근한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사라졌다. 매리는 그들이 퇴근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사는 건네지 못했다. 모든 것이 프로젝트에 집중되어 있었다.
'천지글라스... 이 지경이라니...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어... 아무도 손대지 못한 거야... 골든 타임도 있었을 텐데... 결국 돌고 돌다가 나한테 온 거잖아. 9회 말 투 아웃에 대타 뛰라는 거야? 종료 시간 3초 남겨 놓고 하프라인에서 3점 슛 쏘라는 거야? 아니야. 더 이상 누굴 탓할 시간이 없어. 무엇을 할 것인가에만 집중하자. 김매리...'
다음 날. 매리의 눈 주변은 다크서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몸은 축 처져 있었다. 아무도 매리에게 출근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매리는 서랍 속에 뒹굴거리고 있던 비타민 C를 다시 끄집어 들었다.
'오늘은 1,000부터... 내일 2,000... 그리고는 바로 3,000이다... 그냥 10,000까지 끌어올릴까? 정신 차려. 초사이어인도 아니면서..'
일주일 후 매리는 출근하자마자 포장된 비타민 분말 한 포를 뜯어 물에 풀고 원샷으로 벌컥 들이켰다. 때마침 이를 보고 있던 황 부장이 매리 대리를 불렀다.
"매리 대리. 전투 준비 태세 갖추고 있구먼. 좋아. 메일은 확인했어. 수고했고 역시 보고서가 금방 나온단 말이야. 그래서 결론은?"
"아무래도... 계속 기업 가치는 답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회생 절차보다 청산이나 파산을 하는 게 경제적 가치가 큽니다."
"청산? 파산? 그랬다가 대출해 준 금융 기관들이 난리가 날 거라고! 파산이라니... 천지 계열사에서 파산?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무조건 회생 절차로 가야 돼! 회생 절차 없이 파산부터 신청한다고 그러면 천지 계열사에 대해 언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법원에서는 계속 기업 가치보다 청산 가치가 높은 회사에 대해 회생 절차를 승인해 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회생 절차 또한 금융 기관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라는 것은 똑같은 이슈이고요... 파산보다는 낫겠지만..."
"그럼 이대로 또 계속 우리가 천지글라스에 돈을 빌려줘야 한다고? 이 부실한 회사에다가? 이러다가 우리 천지상사마저 침몰될지도 몰라! 더 이상의 자금 대여는 안 돼. 배임 이슈가 제기될지도 모른다고!"
"천지글라스의 부실 경영을 지금까지 왜 방치했냐는 사실을 콕 집어 얘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진행해 볼 방법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뭔가?"
"그건... 청산형 회생 계획안을 제출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있어? 말이 너무 어려운데?"
"네. 지금 천지상사는 천지글라스를 지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지글라스를 매각해서 새로운 인수자를 찾게 되는 것이죠. 그 절차를 회생 절차라는 진행 과정에서 실행하는 겁니다. 금융 기관 입장에서도 천지상사보다는 새로운 전략적 투자자가 참여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이런 논리라면 법원 설득도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법무 법인이랑 회계 법인 쪽에서는 뭐래?"
"가능성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설득 논리는 있다는 의견입니다."
"그래...? 일단 사장님께는 운만 띄워봐야겠네... 알았어. 어서 출발해."
매리는 황 부장에게 인사를 한 뒤 동료들과 어색한 손인사를 나누고서는 캐리어를 끌고 회사 정문을 나섰다. 자가 차량의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시동을 켜고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천지글라스... 남은 거리 350 km... 4시간은 가야겠네...'
매리는 고속도로에서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좋아하던 핫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천지글라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시속 120... 130... 140... 뒤늦게 발견한 과속 단속 카메라에 벌금까지 납부할 생각 하니 속이 상했다. 마침내 매리는 천지글라스 정문 앞에 도달했고, 차량 출입 차단기는 신원을 밝히라는 듯 내려가 있었다. 매리는 차에서 내려 경비실로 걸어갔다.
"어디서 오셨어요?"
"네. 저는 천지상사에서 온 김매리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여기로 파견 발령받았습니다."
"아! 총무팀으로부터 연락받았습니다. 여기 와서 출입증 등록하시죠."
출입 등록을 마치고 출입증을 발급받은 매리는 사무실 본관으로 보이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본관 앞 주차를 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재무실'이라고 쓰인 곳을 찾아 향했고 침묵으로 닫힌 문을 열었다.
"아. 혹시 천지상사 김매리 대리님이세요?"
"네. 제가 김매리입니다. 이 부장님이시죠?"
"먼 길 오셨네요. 메일로만 인사드리다가 이제야 얼굴 뵙니다."
"좋은 일로 뵀어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아. 너도 인사해야지. 해일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해일 사원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매리 대리입니다."
"정해일 사원이 입사한 지는 이제 3년밖에 안 되었어도 아주 똑똑하고, 꼼꼼하게 일도 잘 처리합니다. 김매리 대리님 업무를 옆에서 제일 많이 챙길 거니까 잘 봐주십시오. 저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부장님 별말씀을요. 그럼 앞으로 정해일 사원에게 주로 자료 요청하겠습니다."
"네. 해일아. 잘 도와드려야 된다. 알지? 매리 대리님한테 우리 회사 앞날이 걸려 있어. 잘못되면 여기 사람 다 잘리는 거야."
"네. 부장님. 저도 이제 결혼 1년 차라서 직장이 너무 중요합니다. 입사했을 때는 다들 좋은 회사 갔다고 부러워했는데..."
"그래도 살릴 길을 찾아봐야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매리 대리님. 저녁은요? 식사는 하셔야지?"
"제가 숙소를 또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식사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맞네. 숙소부터 먼저 챙기셔야 되는구나. 알겠습니다. 여기는 17시 퇴근이 아니고 17시 30분 퇴근이니까 그때 맞춰서 가시면 됩니다."
"퇴근 시간이 미뤄졌네요. 출근도 그럼 늦게 하면 되겠죠? 알겠습니다. 아침잠 시간 늘어나서 좋네요."
다음 날. 천지글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매리를 보면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 부장은 사람들이 워낙 숫기가 없어 그런 거라며 별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매리는 이 부장과 해일에게 청산형 회생 계획안 제출에 대해 설명했다.
"이게 천지상사와 천지글라스 모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입니다."
"천지상사는 이제 더 이상 자금 지원이 힘든가 보네요."
"네, 부장님. 천지상사도 지금 부실 계열사들에 서 준 지급 보증 때문에 모든 유동성이 막혀 있습니다. 천지글라스는 대규모 설비 투자를 계속 요청하시지만 지금처럼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천지상사의 자금 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근데 그건 경영진의 의지 아닌가요? 설립할 때는 얼마든지 도와줄 것처럼 다들 얘기하셔 놓고서는... 이제 와서야..."
"부장님. 무슨 말씀하시고 싶으신지 이해는 갑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온 겁니다. 악역을 맡을 사람... 천지상사에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요."
"매리 대리님도 참 딱하긴 하네요. 그런데 과연 우리 천지글라스를 인수해 줄 회사가 있긴 할까요?"
"해 봐야죠. 일단 회생 절차에 대해 승인을 받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회생 절차에 실패하면..."
"실패하면?"
"금융 기관이 모두 천지상사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라고 하겠죠..."
"그렇게 되면 우리 매리 대리님이 집으로 가셔야 될지도 모르겠네?"
"..."
"그냥 농담으로 한 번 해본 말이에요. 천지상사가 그 지경이 된다면 아마 천지상사가 천지글라스 사람들을 모두 해고시켜 버리겠죠. 이렇든 저렇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회생 절차밖에 없네요. 금융 기관들은 좀 뼈 아프겠지만..."
"네. 부장님. 해일 씨. 저는 천지글라스를 위한 길이라고 지금의 일을 아름답게 포장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천지상사를 위한 이기적인 발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천지글라스와 부장님, 해일 씨에게도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각자 생존 입장에서만 냉정하게 보자고요."
"그전에 천지상사 사람들이 와서 매번 빈 껍데기처럼 도와줄게, 도와줄게 하고 얘기만 하고 가는 거랑은 확실히 매리 대리님은 다르긴 하네요. 왜 파견 보냈는지 알겠다. 오늘은 식사 같이 할 거예요?"
"네. 그럼요. 이제 저희는 회생 절차라는 배를 함께 탔잖아요. 화합하는 의미로 같이 드시죠."
이 부장과 해일은 매리를 현지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매리는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주문 가능한 메뉴는 오직 홍어애탕 하나였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호불호가 강하다고 들어 보기만 했었다. 당황한 듯한 매리에 이 부장이 말을 꺼냈다.
"한 번 드셔보실 수 있겠어요? 이거 보통 사람 아니면 잘 못 먹는데. 내가 또 괜히 데려왔나?"
"아닙니다. 먹어보겠습니다. 주문하시죠. 사장님! 여기 주문이요!"
매리는 떨리는 손으로 홍어애탕을 한 국자 푹 떠서 본인의 앞접시에 옮겼다. 조심스레 숟가락으로 한 입을 먹어보았다. 귀와 코에서 생전 겪어보지 못한 찡함이 밀려들어 왔다. 삭히고 삭혀 버린 찌를 듯한 맛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시간이 지나 보니 '응?' 낯설었고 강렬했지만 흥미로운 맛이었다. 거칠었지만 그 맛은 진실했다. 감추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거짓이 소멸된 맛이었다. 두 번째 맛을 보았을 때는 '오!' 뭔가 자신의 몸에서 찾던 음식인 거 같다는 본능이 깨어났다. 그때부터 매리는 홍어애탕을 폭풍 흡입하기 시작했고, 이 부장과 해일은 한 숟갈 뜨고 그만 먹겠지라고 생각했던 매리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제 이 부장, 해일, 매리는 헤어지려고 했다. 이 부장은 대리운전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사과를 하고 먼저 떠났다. 해일, 매리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리 대리님. 홍어애탕 정말 잘 드시던데요?"
"응. 너무 맛있었어. 난 가식적인 거 정말 싫어하거든... 홍어애탕은 정말 음식이 자기 색깔이 뚜렷하더라고. 그게 너무 좋았어."
"그럼 대리님. 정말 솔직하게 말이에요. 우리 회사 매각될까요?"
"응?"
"매각이 안 되면 말이에요. 법원에서 회생 절차가 먼저 승인되어야겠지만... 어찌 됐든 매각이 안 되면 우리 회사는 살 방도가 없으니까요. 저도 물론 회사를 나가야 되겠죠..."
"매각이 안 되면 천지글라스도, 천지상사도 둘 다 살아남기 힘들어지는 거야. 이 길은 가고 싶어 가는 길이 아니잖아. 이 길밖에 없어서 가는 거지. 더 이상 선택할 옵션은 없어."
"그렇죠... 이런 고민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는 거겠죠..."
"그래. 해일 씨 고민은 나도 충분히 이해해. 우리는 언제나 조직과 자신의 생존을 모두 고민해야 하는 존재니까. 우선 법원에게 매각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설득시켜야 돼. 은행에서는 난리를 치겠지. 본인들의 채권이 동결되고 재조정될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리고 은행은 대손 처리를 해야 해. 하지만 은행에도 매각을 통한 방식이 결국 최선이라는 것을 설득시켜야 해. 이해관계자를 설득해야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일이야. 물론 그 길에 대해 책임은 져야겠지. 그러니 해일. 똑똑한 네가 잘 도와줘."
"네! 알겠습니다. 제가 자료는 성실하게 잘 만드니까요. 감사합니다!"
어두운 저녁이었지만 매리의 두 눈은 확신으로 반짝였다. 매리에게는 자신의 생존을 쫓는 나약함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가야 할 길, 옳다고 생각한 길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해일은 매리에게 무기력해진 천지글라스 사람들과는 다른 에너지를 느꼈다. 입사한 이후 처음으로 느껴지는 직장인의 모습. 한편으로는 매리가 외계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리는 해일을 향해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 해일은 자신의 심장 속에 자그마한 태양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다음 날, 매리는 법원에 제출해야 할 회생 절차 신청 최종 자료를 작성했고, 선임된 회계 법인, 법무 법인도 모두 각자 맡은 범위에서 크로스 체크를 진행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매리는 황 부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황 부장님.
경영기획본부 김매리 대리입니다.
3년 전, 신규 법인으로 설립된 천지글라스는 기술력은 충분하지만 갑작스러운 시황의 하락으로 판매 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영업 손실을 기록. 이에 채무 변제 능력이 상실된 상황이며 현재 시황 기준 사업을 계속할 경우 부채만 늘어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바로 청산을 진행한다면 천지글라스의 자산 70%를 차지하는 대다수 기계 설비들은 범용 설비가 아니기에 고철로 처리되어 버릴 것입니다. 결국 천지글라스의 대규모 기계 설비들을 가동하여 영업으로 연계할 인수자를 찾는 것이 주주인 천지상사와 금융 기관 채권자에 대해서도 최선입니다.
이에 첨부와 같이 법원에 청산형 회생 계획안을 제출하고자 하오니, 승인하여 주시면 법원의 감독 하에 회계 법인과 천지글라스의 매각을 추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지상사 이사회는 회생 계획 제출을 승인하였고, 법무 법인은 법원에 준비된 청산형 회생 계획안 신청 서류를 바로 접수했다.
'과연... 될까? 법원에서 회생 계획을 승인하여 줄까?... 제발...'
매리는 자리에서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지글라스의 회생 절차 신청이 진행되었다는 소식에 은행 담당자가 연락이 왔다.
"우리한테 상의를 먼저 하셨어야죠! 갑자기 이런 결정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네... 먼저 연락드리지 못해서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하지만 이게 결국 은행 입장에서도 최선입니다. 더 이상은 천지글라스도, 천지상사도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매수자를 찾아보겠습니다."
"이러시면 저희는 어떻게 보고하라는 말씀이세요! 아 진짜... 지점장님한테는 뭐라고 얘기해야 돼... 끊어요!"
이주일 후, 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별도의 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법원에서 회의를 하자니... 회계 법인 신 상무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회의는 담당 판사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배정된 판사는 매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었다. 신 상무와 매리가 회의에 참석했다.
"이 사안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금액도 크고요. 무엇보다 이것이 채권자의 권리를 해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겠지요."
"네, 판사님. 저희도 그래서 계속 사업이 아닌 청산형 회생 계획안을 제출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경험 많으신 회계 법인의 상무님께서 주관하신다고 하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 같기도 하고요. 그걸 한 번 여쭤보려고 한 거예요. 이 매각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건지."
"한 번 시장에 문을 두드려 봐야죠. 동종 업계나 신규 사업을 계획하는 회사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좀 더 서류 살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뒤, 법원에서 천지글라스의 청산형 회생 계획안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매각에 모든 것이 달렸다. 회계 법인 신 상무는 회생 절차 기업의 매각에 베테랑이었다. 그는 이미 시장에 사전 투자자 탐색을 완료해 놓은 상태였고, 천지글라스 매각에 대한 투자 설명서(티저)를 발송했다. 국내 회사 세 곳에서 천지글라스에 대한 인수 의향서를 제출했다.
그날 저녁, 황 부장이 천지글라스 정문 앞으로 왔다. 그는 매리를 태우고 회계 법인 신 상무와 저녁 식사 자리로 이동했다.
"상무님. 얼굴이 더 좋아지셨습니다."
"부장님도 잘 계셨죠? 항상 이렇게 힘든 프로젝트만 맡으시네요."
"제가 뭘요. 실무는 여기 매리 대리가 다 하는데요. 이 친구가 일을 잘하니까 제가 많이 의지를 합니다. 과속 벌금도 낼만큼 열정이 강한 친구예요. 그렇게까진 하진 말랬더니... 하하!"
그렇게 술과 안주를 함께 나누며 술자리가 익어갈 무렵.
"만약 매각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최악의 상황이죠. 법원에서는 회생 절차를 결정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라는 오명을 씌게 되고, 법원이 회생 절차를 철회하면 다시 은행은 천지글라스와 천지상사에 채무 상환을 압박할 겁니다. 양 사의 경영권마저도 위협받게 될 수도 있죠."
"아... 정말 감당이 안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아주아주 희박한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그게 뭡니까?"
"법원에서 직권 파산을 시키는 거예요."
"직권 파산이라고요?"
"네. 법원이 직접 천지글라스를 파산시켜 버리는 거죠. 근데 사례가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이 법인에 대해 의사 결정을 내려버리는 거거든요. 책임이 모두 법원에 있기 때문에 보기 드물어요."
"법원에서는 회사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 나 몰라라 해버리는 게 낫지. 법원에서 직접 이 회사는 파산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게... 사회적으로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데... 법원이 나선다?"
"네... 미식축구로 따지면 직권 파산은... 천지상사한테는 헤일메리 패스 같은 거죠."
"헤일메리 패스요?"
"네. 제가 미식축구를 자주 보는데... 왜 티비 보다 보면 경기 종료 직전에 저기 멀리서 길게 패스 던져줬는데 그게 갑자기 득점으로 이어지는 거 있잖아요? 하이라이트에 한 번씩 나오는 거."
"네 봤죠. 종종."
"그게 헤일메리 패스라고 해요."
"하... 근데 법원이 우리한테 그런 패스를 해 줄까요? 정말 매각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요. 사실 저도 회생 절차와 파산 업무만 20년 했지만 천지상사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습니다. 직권 파산은 영화 같은 이야기예요. 결국 매각에 모든 걸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 정말. 오늘 술이... 쓰기도 한데 왜 이렇게 달기도 한 거죠? 한 잔 더 하시죠. 천지글라스의 성공적인 매각을 위하여!!"
같은 날 저녁, 해일은 투자자들에게 보낼 천지글라스의 공식 자료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술부 최 차장과 통화를 진행했다.
"최 차장님. 보내주신 파일 봤는데... 진짜 스펙 이렇게 보내도 됩니까?"
"해일아. 뭐 어쩌겠어. 그게 최선이야. 매각 안 되면 다 망한다며?"
"아니 그래도..."
"너는 이제 결혼해 가지고... 너라고 뭐 다른 방도 있냐? 일단 매각만 시켜. 그 담엔 또 그때 해결하면 돼. 해일아. 살아보면 있잖아. 해일아, 다 그때그때마다 살 방법이 있더라. 급한 불부터 끄자. 응?"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해일은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누구랑 통화했어? 최 차장?"
"네. 전 제품 스펙 자료 바꿨으면 좋겠는데... 제 맘처럼 잘 안되네요."
"이미 바꿀 사람들이었으면 회사도 벌써 바뀌었겠지. 냅둬라. 너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우리 세대가 젊은 직원들한테 몹쓸 짓을 하네."
"부장님이 무슨 잘못이시라고요. 전 괜찮습니다. 이것도 제가 배우고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해일아.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인수자들의 실사가 진행되었다. 그들은 최종 확정된 재무제표, 인허가, 생산 프로세스, 계약 현황 등 자료들에 대해 검토를 모두 마쳤고 각자 일정에 맞추어 천지글라스의 공장과 재고들에 대한 현장 실사까지 진행했다.
인수를 하러 온 투자자 중 한 명이 신 상무에게 물어봤다.
"상무님. 여기 제품... 혹시 고객사에서 들은 말씀 없으세요?"
"네? 고객사에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 뭐. 아닙니다. 그냥 한 번 말씀드려 본 겁니다. 어차피 회생 절차 들어간 회사인데... 기계가 아까워서 말이지... 잘 보고 갑니다!"
그렇게 투자자들의 실사가 끝나고 인수 제안서 제출 마감일이 다가왔다. 제출 마감 시한은 정확히 16시다. 해일과 매리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16시 정각. 회계 법인 신 상무에게서 매리에게 전화가 왔다.
"매리 대리님?"
"네, 상무님. 어떻게 됐죠?"
"거기 지금 천지글라스 직원분들 같이 있죠?"
"네. 여기 재무 담당 직원분들 같이..."
"아 그럼 밖에 나가셔서 전화를 다시 걸어주실래요?"
"네. 알겠습니다."
매리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 부장과 해일은 그런 매리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매리는 주차장에서 신 상무와 통화를 마쳤고 바로 황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멀리서 비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매리가 돌아오지 않자 해일은 혹시나 매리가 비를 맞을까 봐 우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서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창밖을 보니 최 차장과 직원들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축구공을 바닥에 튀겨가며 우르르 족구를 하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최 차장을 뒤따르는 직원들이 양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에는 막걸리가 찢어질 듯 채워져 있었다. 해일은 다시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은 뻘쭘한 듯 이제 막 16시 30분을 가리켰다.
'후... 이 시간에...'
해일은 떨리는 손을 다독이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음 날, 이 부장, 해일, 매리는 점심을 함께 했다.
"결국 잘 안되었나 보네요."
"네, 부장님. 어 잠시만요? 신 상무님 문자가 왔는데... 3일 뒤에 판사님이 집무실에서 회의를 소집하셨네요. 3월 31일 오후 1시..."
"회의? 뭐 때문이지? 이제 다 끝났는데..."
"아마 회생 절차 이후 상황에 대해 뭔가 하실 말씀이 남은 거 같네요."
"아... 부장님...?"
"어. 해일아."
"저는 31일에 연차를 좀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왜? 벌써 어디 원서 넣었냐? 빠르네. 그래 어디 면접인데?"
"아 면접이 아니고요. 그날 아버지 병원 모셔다 드리는 날이라서요."
"아 그러냐? 그래. 잘 모셔다 드리고 와라."
"해일 씨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잘 다녀와. 아무튼 판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예상이 안 돼요."
3일 후, 신 상무와 매리는 판사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저도 매각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게 나와서 안타깝습니다."
"네, 판사님. 판사님께서 오히려 저희 쪽을 배려해 주셔서 이런 과정까지 올 수 있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거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상무님께서 무슨 죄송하실 게 있나요. 최선을 다해주셨는데요. 배려가 아닙니다. 저도 이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이렇게 끝나버린 게 좀 허탈할 따름입니다. 같이 오신 직원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판사님. 김매리 대리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자.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채권자 입장에서 최선일지 고민을 좀 해보았습니다만..."
바로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리는 깜짝 놀랐다.
"해일 씨! 여기 어떻게 알고?"
"판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천지글라스의 정해일 사원이라고 합니다."
"네. 어떤 일로 오셨죠?"
"이번 회생 절차와 관련해서 제가 꼭 판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사실... 저희 천지글라스의 기술은... 후..."
정적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판사의 집무실은 블랙홀로 빠져들어간 세상인 것 같았다.
"저희 천지글라스의 제품 스펙은... 조작입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데이터 조작이라고요. 아직 핵심 불순물 제어 기술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저희 천지글라스 직원들이 다들 밥 벌어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차마 기술이 없다는 말을 하질 못 했습니다. 아니 그전에도 얘기는 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왔던 임원들이 전부 감추라고만 해서 말도 못 했습니다. 필요하시면 제가 여기서 당시 대화 녹취도 깔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근데 그걸 지금 저한테 와서 얘기하시는 이유는?"
"진실입니다. 진실. 저도 거짓말 말고 진짜 일하는 직장인이 되고 싶어서요."
"네?"
"더 이상 조작된 자료 안에서 보고서만 맞춰 쓰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매각이 물 건너간 상황에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사실 이기적인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게 앞으로 제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을 일이라고 결심했습니다. 판사님께서 이런 부분을 헤아려 주셔서 결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이제 이해하겠습니다. 말씀 다 끝나셨나요?"
"네. 감사합니다."
해일은 판사 집무실을 떠나 복도 끝 화장실에 들어갔고, 잠시 후 복도에는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신 상무님. 사실 제가 결심했던 내용이 있었는데요. 그게 51 대 49였는데 방금 저 직원분이 얘기하신 내용을 듣고 나니 100 대 0으로 제 결심이 굳어졌습니다."
"판사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직권 파산 선고를 하겠습니다."
"네?"
"이 회생 절차 진행은 제가 책임진 부분도 있습니다. 채권자 이익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매각이 잘 안 되었으니 이걸 회사 측에 떠넘기는 것도 제 성격에 맞지가 않네요. 제가 아직 젊어서 그런 걸까요?"
"판사님..."
"기술적 하자가 있는 기업이라면 더욱 여기서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이 채권자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죠. 여기서 회생 절차를 철회했다가는 천지글라스의 고정비만 계속 쌓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제가 듣고 본 그대로 믿고 판단하겠습니다. 정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천지글라스 회생 절차의 종결과 함께 법원에서는 천지글라스에 대해 직권 파산 명령을 내렸다. 천지상사는 더 이상 자회사에 대한 경영 부담을 지지 않게 되었고, 천지글라스 직원들은 파산 관재인을 지원하는 직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한 달 뒤, 해일은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어! 매리 대리님! 잘 지내시죠? 너무 반갑습니다."
"해일 씨. 잘 지내? 난 이제 예산 부서로 보직 변경됐어. 해일 씨는?"
"저야 뭐. 이곳저곳 원서 넣고 있죠. 그래도 후련합니다."
"응. 다름이 아니라 우리 부서에 경력 사원 채용이 있어서. 나 해일 씨랑 일하면 너무 좋을 거 같거든. 황 부장님도 오케이 했어. 물론 면접은 통과해야 되는 거지만 말이야."
"아 진짜요? 저도 매리 대리님이랑 일하면 너무 좋죠. 배울 점도 많고."
"그래? 그럼 지원해 볼래?"
"아니요. 마음만 감사합니다. 저는 저만의 길을 가 보고 싶어요.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 정말? 그래... 해일 씨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 언제든지 마음 바뀌면 지원해 줘!"
"네. 감사합니다! 대리님 건강하세요!"
일 년 후, 매리는 다시 점심시간에 가로수길을 걷고 있었고, 헤일메리 호프집에는 어느 제약 회사 재무실 신입 사원 환영회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매리는 요즘도 이런 방식으로 환영회를 하는 곳이 있구나 신기해하며 다시 회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해일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전화를 하진 않았다.
그날 저녁 헤일메리 호프집에서는 예정대로 신입 사원 환영회가 열렸다. 한 남자의 자기소개 순서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재무실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게 된 정. 해. 일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