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젠가로운 회사생활

쌓아 올라가기 위해 무너뜨려야 하는 역설의 잔해

by 로마노

[작가의 말] : 성장에도 정석이 있을까
나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 그리고 동료의 성장.
우리가 꿈꾸는 성장의 모습이란 기초를 다져가며 한 단계씩 쌓아가는 안정적인 피라미드일 것입니다.

하지만 직장은 어떻게 쌓아질지 예측할 수 없는 야생 그 자체에 가깝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파격적이고, 누군가에게는 참혹하기도 합니다. 텅 빈 아랫단 위로 높게만 솟구치려고 하는 것도 과연 성장일까요? 성장의 이면. 그 부조리한 풍경을 담았습니다.

<젠가로운 회사생활>

"주차장이야, 폐기물 처리장이야... 포대자루들이 한가득 쌓여 있네..."

마 대리는 핸들을 꺾어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주차공간을 찾아 헤매다 10분이 지나서야 비어있는 주차라인을 확인했다.

'간신히 주차했네. 앞으로도 주차하기 제법 힘들겠는걸. 와... 공장이 얼마나 큰 지 한 눈으로 담아지지도 않네. 옆에 저게 본사 건물이구나! '넥스트머티리얼' 간판이 아주 으리으리하네!'

마 대리는 8년 차 생산직 출신 연구원이다. 성분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던 마 대리는 첫 회사에서 생산 업무를 마치고 이곳 '넥스트머티리얼' 연구개발부서로 이직했다. 마 대리는 본사 건물의 웅장함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추위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그저 얼떨떨한 채로 마 대리는 본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구개발실이 있는 3층으로 도착했다. 복도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뜻한 히터 바람이 차가운 외기에 둘러 쌓여있던 그를 감쌌다. 사무실로 이어지는 자동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널찍이 배치된 사무공간. 은은하게 퍼지는 모던한 가구들의 냄새. 그 속에 뒤섞인 디퓨저의 체리향까지. 모두 마 대리의 도파민을 짜릿하게 했다.

"자네가 마 대리인가? 반갑네. 자네의 사수를 맡은 최 과장이야."
"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여기와 보니 분위기는 어떤가?"
"아... 고시원에 있다가 갑자기 5성급 호텔에 온 기분입니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뜬금없는 비유에 책상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부터 너무 솔직했습니까? 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3층이 쩌렁쩌렁하게 떠나갈 듯 마 대리는 인사를 마쳤다. 수줍은 듯 능글맞은 듯. 그러나 순수한 마 대리의 말투와 행동은 사람들의 경계를 누그러뜨렸고, 다들 그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했다. 3층 직원들과의 인사를 마칠 때 즘 누군가가 외쳤다.

"부장님께서 모두 회의 참여하시랍니다!"

재무부서 주관으로 대회의실에서 전 직원회의가 열렸다. 마 대리도 참석하기로 했다.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 회의실 문 옆에 위치한 정수기 위에는 '별다방'에서 나온 믹스 커피가 놓여 있었다. 늘 마시던 노란 믹스 커피가 아니었다.

"재무부서 신 부장입니다. 올해 회사 실적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회사가 재작년 설립된 이후로 작년에는 영업손실 80억 원을 기록하였는데 올해는 손실이 더욱 커진... 영업손실 180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신 부장의 설명이 끝나고 다들 숙연해졌다. 그때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영업손실에 가장 큰 원인이... 뭐요?"
"네. 사장님. 아무래도 시황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가격이 좀 받쳐줘야만 되지 않을까..."

신 부장의 답변에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된 결과였다고 이미 눈치챈 모습들이었다. 직원들은 술렁였지만 마 대리는 오히려 담담했다. 설립 2년 차 회사니까. 사업 초기에 겪는 진통을 이겨내면 '넥스트머티리얼'도 언제든지 턴어라운드 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그 행보에 선봉이 되겠다고 의지를 굳혔다.

신 부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는 오늘부로 파견이 종료됩니다. 새로 오시는 대표이사님과 재무부장님이 여러분들과 '넥스트머티리얼'의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가실 거라 믿습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달 후, 새로운 사장님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재무부서에는 진 과장이라는 사람이 왔다. 부장급은 아니었다. 마 대리는 복도에서 진 과장과 마주했다. 비록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직급이긴 하지만 같은 경력 사원이라는 점에서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연구개발실 마 대리라고 합니다. 저도 이제 경력 사원으로 입사한 지 3개월이 지났는데 차장님과 앞으로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보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전 과장입니다. 차장이 아니에요. 큰일 날 소리."
"아! 왠지 조만간 차장님이 되실 거 같아서... 제가 말이 헛 나왔습니다."

진 과장은 쑥스러워하는 마 대리를 향해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는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움과 카리스마가 공존한 듯했다. 진 과장은 발걸음을 멈춘 뒤, 돌아서서 마 대리를 불렀다.

"아! 마 대리...?"
"네! 부르셨습니까. 차장님! 아니.. 과장님!"
"여기 들어오는데 주차장에 넘치는 푸른 포댓자루들이 전부 다 뭐죠?"
"포댓자루? 저희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입니다. 거의 폐기물이죠."
"부산물? 제품을 생산하면서 나온 잔여물들... 이란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성분을 찍어보면 아주 일부는 회수율이 높게 나오긴 하는데 대다수는 공정에 리턴 시켰다가는 처리 비용이 비싸서 지금은 쌓아두고 있습니다. 유효 성분만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최소 200억 원 정도는 되겠지만 사실상 무의미..."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재무부서지만 우리도 생산 프로세스를 이해해야 하니까... 성분 관련 세부 스펙과 매스 밸런스 자료를 메일로 공유해 줄래요?"

마 대리는 찰나의 대화였지만 재무부서 직원임에도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진 과장이 신기했다. 그의 진보랏빛 머플러 때문이었을까. 작업복을 입고 있는 마 대리와는 달리, 창 밖에 비친 푸른 포댓자루들 옆에 서 있는 진 과장의 모습은 마치 게임 속 마법사 캐릭터 같았다.

새로 온 사장은 열정이 넘쳤다. 대학교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던 SWOT 분석을 강조했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각 부서마다 영업흑자 달성을 위한 과제 도출 및 실행 계획 수립을 위한 회의들이 전개되었다.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회의실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내부 분위기는 뜨거웠다. 연구개발실도 마찬가지였다. 연구개발실 회의는 담당 부장이 주재했다.

"고정비 절감을 위해 생산을 늘리다 보니 고객사의 기준을 초과하는 격외품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야. 우리 연구개발실은 스펙-인 제품 비중을 높이기 위해 올해부터 신규 공정을 도입할 예정이고 더 많은 연구개발비가 투입될 예정이니 연구개발실 직원 모두들 올해 야근도 불사해야 할 거야."
"부장님. 말씀 중 죄송하지만 혹시 개발비가 어느 정도일까요?"
"최 과장 질문 잘했어. 매년 최소 100억 원 이상 투입이 될 예정이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씩 기술력을 쌓아가고 과제를 해결해 나가다 보면 흑자 전환도 성공할 거라 믿어. 마 대리는 현재 격외품 규모와 향후 연구개발 계획에 대해 재무부서 진 과장과 공유하도록 해."

마 대리는 100억 원이라는 숫자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신은 100억 원은커녕 1억 원도 아직 모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의 손바닥은 책임감으로 흥건해졌다.

그날 저녁, 연구개발실 직원들의 사기 향상을 위한 회식이 진행되었다. 메뉴는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소주 한 잔. 회식을 마친 마 대리는 대리운전 대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갔다가 경력직으로 함께 입사한 재무부서 민 대리를 만났다.

"민 댈! 오랜만이네. 안녕?"
"마 댈. 회식했나 보네? 삼겹살 냄새 제대로 풍기는걸?"
"냄새 많이 나냐? 민망한데. 히히. 요즘 재무부서 분위기 어때?"
"우리? 너무 좋아."
"그래? 점심은 다들 어떻게 먹어? 난 왜 먹는데 관심이 많은지 몰라."
"진 과장님이 직원들 알아서 먹으라고 법인카드 주셔. 대박이지?"
"진짜? 우린 늘 공장 앞 코다리집만 가는데... 진 과장님은?"
"응. 과장님은 혼자 드시거나... 가끔은 사장님이랑? 드시기도 해."
"아 정말? 그럼 재무부서는 메뉴도 직원들끼리 자유롭게 고르겠네?"
"크크. 부러우면 나중에 얘기해. 돈가스 먹을 때 데려갈 테니까."
"대박! 민 댈! 너 갑자기 예뻐 보인다? 아깐 몰랐는데."
"뭐야. 나 어제도 예뻤거든? 마 댈. 너 요즘도 젠가로 부서 배틀 하냐?"
"그럼! 나 젠가의 페이커야! 언제든지 도전받아주지!"

그렇게 떠들썩한 1년이 흘렀다. 주차장에 포댓자루들이 아주 소량이지만 일주일에 하나둘씩 공장으로 리턴되기 시작했다. 회의실 문 옆에 있던 '별다방' 믹스 커피는 어느샌가 노란 믹스 커피로 바뀌었다.

오전 11시. 회사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갑작스레 메일을 발송했다.

"금일 14시 대회의실, 사장님 경영 설명회 예정. 전원 참석 바람"

사장님이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경영 설명회를 주재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3시 50분. 직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속속 회의실의 자리를 채웠고 14시 정각. 사장님이 단상에 올라오셨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급하게 모이라고 한 것은... 올해 회사의 실적이 오전에 집계가 완료되었고,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올해 회사는 작년 영업손실 180억 원에서 올해 영업이익 20억 원으로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턴어라운드에 성공했습니다...!!!"

사장님의 '흑자 달성'이라는 말에 직원들은 다들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특히 창립 멤버 직원들은 3년 가까이 기다려온 갈증이 해소되며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오늘은 모든 부서 저녁 회식합시다! 이건 사장인 저의 특별 지시입니다. 제가 부서 회식 장소를 일일이 방문해서 고생하신 직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갑시다!"

그날 공장 앞 고깃집들은 회사 단체 예약을 소화하느라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다음날, 회사 승진자 발표가 이어졌는데 진 과장님과 민 대리도 명단 가운데 있었다.

'과장님 승진하셨구나! 이제 찐 차장님이시네. 어서 축하드려야지! 민 대리? 뭐야... 나보다 경력이 많았어? 축하해 줘야겠네.'

이듬해 신규 공정 도입을 위한 실험 단계 테스트가 통과했고 보고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 진 차장은 다급히 실험 결과를 요청했다. 그는 승진을 했어도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회사는 연이어 30억 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승진자 발표가 있었는데 진 차장의 이름이 보였다.

'1년 만에 또 승진하셨네. 부장님이라니. 축하드리기도 슬쩍 민망해지는 걸? 나는 여전히 대리인데.'

이듬해 회사는 35억 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직원들에게는 특별 보너스까지 지급되었다. 회의실 문 옆에는 다시 '별다방' 믹스 커피가 채워졌다. 이어진 승진자 발표 명단에는 진 부장의 이름이 가장 위에 있었고 그 아래는 민 과장의 이름도 있었다.'

'또 승진이라니! 3년 연속 승진? 게다가 상무? 임원이야! 임기도 1년이 아니라 2년이네. 대박! 민 과장... 아니 민 차장도 승진했네? 나랑 두 단계 차이 나는 거야? 완전 점프 업 했네...'

해가 바뀌었다. 회사가 실적을 공유하기 전에 승진자 발표부터 먼저 진행되었는데 명단에는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됐어! 드디어 나도 마 과장이야! 민 차장한테 자랑해야지!'

마 과장은 민 차장에게 전화를 곧장 걸어 승진 기념으로 밥을 먹자고 했지만 민 차장은 외부감사인이 바뀌면서 회계 감사 기간이 길어졌다고 '새끼, 새끼' 하며 투덜대기만 했다. 그리고 승진자 발표 명단 가장 아래에 뜬금없이 희망퇴직자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진 상무의 이름이 보였다.

'뭐지? 진 상무님. 희망퇴직이라니?'

다음날 마 과장은 민 차장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혹시 점심을 같이 먹자는 내용인가 싶어 다급히 메일을 열었는데 메일에는
'수신 : 재무부서 마성용 사원'으로 되어 있었다.

'민 차장. 엇갈릴 만도 하지. 마성룡이랑 마성용... 후훗'

마 과장은 자신에게 잘못 도착한 메일을 마 사원에게 전달하려고 하다가 민 차장을 놀려주기 위해서 도착한 메일 내용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메일 아래로 스크롤을 시작했다.

[수신 : 재무부서 마성용 사원

안녕하세요. 재무부서 민들레 차장입니다.
아래 외부감사인이 보낸 메일 참조하셔서 감사 대응 부탁드립니다.
인수인계 자료는 파일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으니 참조하세요.

감사합니다.
민들레 배상]

'뭐지? 민 차장 퇴사하는 거야?' 마 과장은 당황스러웠다. 멈췄던 메일 스크롤을 떨리는 손에게 다시 맡기었다.

​[수신 : 넥스트머티리얼 재무팀 민들레 차장님]
[제목 : 정기 결산 외부감사 관련 주요 쟁점사항 소명 요청]

​안녕하세요. 넥스트머티리얼 외부감사인을 맡고 있는 사도회계법인 신세기 회계사입니다.

​당 법인은 귀사의 재무제표 기말 감사 중, 아래 항목들에 대해 '중요한 왜곡표시'의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현재 귀사가 제시한 자료만으로는 자산의 실재성을 담보하기 어려우며, 차주 말까지 소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감사의견 부적정' 혹은 '의견거절'이 불가피함을 알려드립니다.

​1. 재고자산(부산물)의 순실현가능가치 평가
• ​주차장 내 적치된 부산물(약 200억 원)의 자산 계상 근거가 불분명합니다. 실제 거래 사례가 전무하므로, 이를 자산이 아닌 폐기 대상으로 간주할 경우 전액 손실 처리가 필요합니다.
​2. 무형자산(개발비) 인식 요건 미충족
• ​자산화된 연구개발비(약 200억 원)에 대해 K-IFRS 제1038호에 따른 '미래 경제적 효익' 입증을 요구합니다. 신규 공정 도입 지연으로 인해 해당 자산은 사실상 가치가 소멸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3. 격외품 재고의 평가 손실
• ​장기 체화된 격외품 재고(약 250억 원)의 시장 판매 이력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해당 재고를 순차적으로 손상 처리할 것을 권고합니다.
​4. 우발부채 누락 (합병 및 구조조정)
• ​합병 전 예정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 계획 및 퇴직 위로금(최대 48개월분) 산정 내역을 공개하십시오. 공시 누락 시 중대한 감사 결격 사유에 해당합니다.

​사도회계법인 감사본부 공인회계사 신세기 배상]


마 과장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주차장에 쌓인 포대자루의 가장 아랫부분을 지나가던 지게차가 건드렸다. 휘청. 휘청. 그리고 마 과장은 되뇌었다.

'젠가롭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