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의 함정. 그건 바로 당신 자신이었다.
[작가의 말] : 성장의 환상, 그리고 제자리표
기업에게 성장이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매출이 정체되고 조직이 고령화될수록, 경영진은 한 번도 발 디딘 적 없는 '야생의 초원'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이 환상에 빠지면 본질이 전혀 다른 사업조차 "우리와 비슷하다"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시스템을 이식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오만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소설 <제자리표>는 비밥(Bebop) 재즈 시장에 뛰어든 클래식 레코드 회사의 이야기를 통해, 무리한 확장이 가져오는 아이러니를 그렸습니다. 요란한 변주 끝에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제자리표처럼, 탐욕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에 대해 작은 경종을 울리고자 합니다.
<제자리표>
"브라보! 언빌리버블!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비밥이야! 예측할 수 없는 싱코페이션을 가지고 노는 임프로비제이션의 현란함!!"
업타운 레코드의 지하 연습실. 뿌연 연기. '더 디거스'의 타이틀 곡 '인디언의 춤' 연주가 끝났다. 연주자들은 얼얼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연주가 성공적이었는지 눈빛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VP 레코드의 대표, 쉬프는 라이브 연주에 감탄한 채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벅차오르는 떨림을 멈추며 말했다.
"다들 표정이 왜 이런가? 긴장들을 엄청나게 한 모양이군 그래!"
"아무래도 현재 클래식의 명가 VP 레코드의 대표님께서 직접 저희 연습실에 오셨으니까요. 긴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업타운 레코드, 그리고 더 디거스에 대한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어. 어떻게 악보 한 장 없이. 고작 헤드 어레인지먼트만 가지고 이렇게 화려한 즉흥적인 연주를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언빌리버블!."
"그래도 어찌 감히. 저희 레코드는 VP 레코드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규모, 명성에 비교하면 세발의 피도 안됩니다."
"자네들이 우리 자회사로 인수되면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거야! 지금의 실력이라면 이미 120% 완성된 것과 같네. 내가 보니 업타운 레코드는 자금력만 충분히 보강된다면 지금보다 열 배, 아니 천 배 이상은 더 커질 것이라고 확신하네!"
"그렇습니까? 쉬프 대표님...!"
"모리스 대표. 자네만 믿네. 세부적인 협상은 우리 인수 담당 부서와 협의하도록 하게. 이제야 우리 회사가 '제자리표'를 떼어버리고, '샵'하게 올라갈 것만 같구먼!"
"알겠습니다...!"
VP레코드의 쉬프 대표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고, 본사로 복귀하여 회사의 M&A를 맡고 있는 인수 담당자 폴을 불렀다.
"쉬프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이봐. 폴. 나 방금 더 디거스의 연주를 직접 듣고 왔네. 어마어마하던데? 근데 왜 업타운 레코드는 우리가 인수할 숏 리스트에서 제외된 건가?"
"아. 그건 컨설팅 회사에 다시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스윙 재즈 열 곳에 투자했는데 그나마 한 세션만이 살아남았지. 그것도 운 좋게... 딕실랜드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기 직전이고, 스윙 재즈도 언젠가는 한계가 올 테지. 우리의 황금알인 클래식 시장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고.. 이래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단 말이야. 다음은 비밥 재즈야. 허나 신인들 찾아서 바닥부터 키우는 스카우팅이나 팜 시스템으로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최소한 음반이 출시된 카탈로그 바이아웃 방식이 최선이라고. 자네도 동감하지?"
"물론입니다. 대표님."
"그래. 그런데 컨설팅 회사에서 제시한 숏 리스트들은 너무 무거운 레코드사들밖에 없어. 그들이 우리 통제 안에 들어오겠나? 그래서 내가 따로 롱 리스트부터 살펴본 건데 거기 업타운 레코드가 눈에 들어왔단 말이지. 지역 기반의 세션이지만... 오늘 더 디거스의 연주는 정말 놀라웠어. 자네 직접 비밥을 들어본 적 있나?"
"저도 아직 실제로 라이브로 접해본 적은 없습니다."
"정말 어메이징 해. 30초의 테마만 서로 합의한 채 그다음부터는 코드의 흐름만으로 서로 독주를 진행한단 말이지. 악보를 만들어놓고 합주하는 클래식이나 스윙 연주와 확실히 달라. 그들에게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단 말이네!"
"뭔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저도 실제로 듣고 싶네요."
"그래, 자네도 직접 가서 한번 들어봐야 해. 그 전율을 느껴봐야 한다고. 그러나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 재즈이고, 결국 음악이야. 우리 같이 탄탄한 클래식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회사가 있어야 할 거라고! 최종적으로는 우리 VP가 리드해야지. 우리가 누군가. 빅토리 포노그래프. 종전 이후의 위대한 승리를 함께 이어가고 있는 레코드 아닌가! 비밥 시장에서도 결국 우리가 승리할 걸세!"
"대표님 말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도 내일 업타운 레코드에 방문해서 더 디거스 세션의 라이브를 들어보고, 바로 인수 협상 진행해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폴. 당장 추진하게. 시간이 없네! 다음 주주총회까지 고작 다섯 달 밖에 남지 않았어! 이 프로젝트로 주주들의 재신임을 얻는 거야!"
"알겠습니다. 대표님!"
대표와의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폴은 서둘러 실무자들을 소집했다.
"모두 자리에 모였나? 자, 우리의 타깃이 변경되었어. 방금 쉬프 대표님으로부터 확인했지. 우리의 바이아웃 타깃은 '업타운 레코드'다."
"업타운 레코드라면. 더 디거스 밴드가 소속된 곳 말씀인가요?"
"그래."
"폴, 거기는 지역 신문사에서는 홍보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아직 소규모의 공연 위주로만 하고 있고, 어느 정도의 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는지는 검증이 안된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쉬프 대표님의 의지가 매우 확고하시더라고. 확인도 해보지 않고 반대하는 것 또한 예의라고 할 수 없네. 우선은 내일 나와 같이 더 디거스의 연주를 들으러 가보자고."
"알겠습니다."
폴은 왜 갑자기 쉬프 대표가 업타운 레코드를 인수하자고 나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쉬프 대표가 음악 비전공자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VP라는 거대한 레코드사의 대표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 흘렀다.
"업타운 레코드의 모리스 대표님, 반갑습니다. 저는 VP레코드에서 인수를 총괄하고 있는 폴 입니다."
"네 어서 오세요. 폴. 오늘 저희 더 디거스의 연주를 보러 오셨다죠?"
"네. 음반으로 녹음된 음악들은 모두 들었고 라이브를 듣고 싶네요."
"아! 그럼요. 그럼요. 더 디거스! 모두들 준비 됐나?"
"..."
"뭐야. 이 친구들. 다들. 준비 됐냐고? 내 말 못 들었어?"
"아... 네... 준비됐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인디언의 춤' 연주 시작해!"
"알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모리스 대표님."
"왜요?"
"'인디언의 춤'은 어제 저희 쉬프 대표님께서 이미 듣고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음반에 수록된 노래 중 다른 노래를 들어봤으면 하는데요?"
"다른 노래라면 뭐 어떤 걸 찾으시는데요?"
"'탄트럼'도 괜찮을 거 같고, '턴스테인' 같은 노래도 괜찮으시다면."
"그건 안 돼요."
"네? 왜 안되죠?"
"그걸 여기 와서 갑자기 해보라고 하면 세션들이 당황스럽잖아요."
"아니. 코드에 따라서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하는 게 비밥 아닙니까? 비밥이 아니더라도 지금 연주가 안된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렇죠. 비밥이죠.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에 대해 클래식만 취급해 온 VP레코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업타운 레코드가 어떻게 탄생했고, 또 어떻게 음악에 대한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떠한 마인드로 음악을 대하는지. VP 같은 거대한 레코드사는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아 네 모리스 대표님. 당연히 저도 업타운 레코드의 철학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음악을 요청드리는 것이 어떤 문제인지..."
"그만! 그만하세요. 오늘은 도저히 연주를 진행할 기분이 아니에요. 돌아가세요. 폴. 내가 따로 쉬프 대표님과 연락할 테니."
"네... 알겠습니다..."
돌아온 폴은 바로 쉬프 대표의 방으로 호출되어 올라갔다.
"이런 무례가 어디 있나! 폴!"
"네? 아니 대표님. 저는 그저 '인디언의 춤' 말고 다른 노래를 청했을 뿐입니다만..."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미리 가기 전에 업타운 레코드와 협의를 했어야지!"
"아니... 대표님 그게 아니라..."
"자네는 오늘 큰 실수를 한 거야. 결례를 범했다고! 당장 모리스 대표에게 연락해서 사과하도록 하게. 그리고 빨리 업타운 레코드에 대한 인수를 진행시켜!"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VP레코드의 업타운 레코드 인수는 한 달 만에 마무리되었고, 언론에서는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제국의 새로운 영토 확장! VP 레코드, 얼리 비밥 플레이어 품다!]
쉬프 대표는 모리스 대표를 방으로 불러 말했다.
"좋아. 이제 인수는 마무리되었고, 모리스 대표님. 우리 헐리우드 볼에서 먼저 콘서트를 진행합시다."
"네? 쉬프 대표님? 헐리우드 볼이라니요? 거긴 1만 7천 석이예요..."
"지금 언론에서 이렇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주주들도 잔뜩 기대하고 있어요. 얼마 남지 않은 주주총회 전에 뭔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리하셔도.. 대표님. 원래 계획은 소규모 공연부터 시작해서 실내 공연으로 넘어가고... 그게 또 성공하면...."
"그건 계획이죠.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보여줄 땐 그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단 말이죠! 우리 VP레코드의 자금력과 네트워크라면 헐리우드 볼 공연 개최 또한 전혀 문제없습니다."
"아 네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 친구들도 잼 세션으로 시작했는데..."
"이보세요. 모리스 대표님... 저는 대표님 졸업하신 학교를 보자마자 인수를 결심했습니다. 배신할리가 없는 곳이죠! 지금도 그 믿음에서는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다고요! 제가 믿어도 되겠죠? 그렇죠?"
"네... 그럼요! 가능합니다! 얼마든지요! 해보도록 하죠!"
그렇게 업타운 레코드의 더 디거스는 VP레코드에 인수되자마자 바로 헐리우드 홀 공연을 하게 되었다. 공연 두 달 전, VP레코드의 공연 책임자 던키가 업타운 레코드를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VP레코드에 던키 라고 합니다. 공연 전 사전 점검을 하러 왔는데요. 공연 당일 총 몇 곡의 음악을 연주하실 예정이시죠?"
더 디거스의 연주자가 대답했다.
"총 열네 곡입니다."
"네. 저도 녹음된 음반은 다 들어봤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연주를 한번 보여주시죠."
더 디거스의 연주가 진행되었다. 첫 음악은 '인디언의 춤'이었다. 그런데 음악이 점점 진행되면 될수록 던키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다음 음악으로 넘어가시죠."
'인디언의 춤'에 이어 '탄트럼', '턴스테인' 등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잠. 깐. 만. 요! 잠시만 쉬었다 가시죠."
던키는 잠시 더 디거스의 연주를 마치게 했다. 그는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서둘러 연습장 밖으로 나와 전화기로 달려갔다. 침묵하고 있는 검은색 플라스틱 전화기의 다이얼을 시계 방향으로 급히 돌려댔다.
드르르륵 - 탁! 드르르륵- 탁!
"폴! 폴! 던키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던키?"
"아니. 방금 더 디거스의 라이브 연주를 들었습니다. '인디언의 춤' 말고 '탄트럼', '턴스테인'까지. 그런데 듣다가 그냥 중단시켜 버렸어요!"
"왜요?"
"이 친구들 코드 체인지가 다 엉망이에요!"
"뭐라고요?"
"'인디언의 춤'도 매끄럽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비전문가가 들었을 때는 그냥 듣기 좋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제 귀는 속일 수가 없죠. '인디언의 춤'은 음반 내에서는 그나마 메이저 세븐 덕분에 들을만했는데 라이브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죠. 그리고 '탄트럼'과 '턴키 스테인'은 마이너 코드와 메이저 코드의 전환이 빠르게 흘러가는 음악들인데 코드가 완전 붕괴되었어요. 기본 도미넌트 코드도 못 잡는 데다가 하프 디미니쉬 코드는 아예 뭔지도 모르는 눈치예요!"
"아니 두 달 뒤면 헐리우드 볼 공연 아닌가요? 그때 다 들통나겠구먼!"
"정말 큰일이에요. 이를 어떡해야 하죠?"
"우선 쉬프 대표에게 보고합시다. 비밥인 척 떠들더니 결국 화성학 하나도 안 된 녀석들이었구먼. 내일 같이 보고 들어가시죠!"
다음날이 밝았다. 폴과 던키는 곧장 쉬프 대표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제 라이브 연주의 실상을 고했다.
"아니! 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 모리스 대표는 최고의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이렇게 운영할 수는 없단 말일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헐리우드 볼 공연을 취소하고, 주주들에게도 더 디거스의 현실을 낱낱이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걸 인수하고자 얘기했던 나보고 책임지라는 말과 똑같지 않은가!"
"쉬프 대표님께서 책임을 지지 않으실 방법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당장 헐리우드 볼 공연에 대한 언론에 기대감이 워낙 뜨겁기 때문에 공연을 취소시키고 예매된 표들에 대해서도 환불을 진행해야 합니다."
"폴, 던키. 자네들 정말 생각들이 짧아. 자네들 도대체 누구 편인가! 문제가 있으면 대책을 세우려고 해야지. 회피할 생각들부터 하고 있나! 이래서 어찌 VP레코드의 책임자들이라고... 이봐. 비서! 당장 제이제이를 부르게. 어서!"
VP레코드의 수석 편곡가인 제이제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봐! 제이제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게. 더 디거스의 음반에 된 수록곡들 있지?"
"네. 쉬프 대표님."
"그 곡들을 지금부터 모든 가용한 인력들을 동원해서 채보하도록 하게!"
"네? 그들의 재즈 장르는 비밥인데요? 스윙이 아닙니다."
"비밥이건. 스윙이건. 모르겠고! 나한테 중요한 건 헐리우드 볼 공연이야. 그 친구들 노래를 던키가 듣고 왔네. 그런데 그 친구들 코드가 죄다 형편없었다고 하지 않나!"
"헤드 어레인지먼트 이후에 코드만으로 즉흥적 연주를 이어가야 하는 비밥인데... 코드가 다 엉망이라니요...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껍데기만 비밥 재즈를 하는 밴드였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아. 더 이상 따질 시간도 없네. 제이제이. 지금부터 어서 채보를 모두 완성하도록 하게. 그리고 던키. 자네는 채보가 완료되면 그걸 가지고 더 디거스에게 가져가서 매일 훈련을 시켜. 그 악보를 모두 통째로 외우라고 해! 이런 기초도 못 배워먹은 벌레 같은 녀석들!"
"하지만 쉬프 대표님. 우리가 업타운 레코드를 인수한 다음부터 더 디거스의 음반 판매량은 급증했고, 그들은 이미 녹음된 노래에 대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악보를 보고 외운 비밥을 한다니요... 이건 더 큰 충격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그리고 매주마다 무슨 연습을 했고, 공연을 위해 몇 퍼센트 정도 완성한 상태이고, 또 다음 주에 어떤 연습을 할 것인지 내가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보고서 올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에잇! 젠장!! 다들 나가 봐! 그 거슬리는 주트 시트도 좀 바꿔 입으라고 해!!"
수석 편곡가 제이제이, 인수 담당자 폴, 공연 책임자 던키는 쉬프 대표의 방을 떠났다. 그리고 대표의 방에서는 '라데츠키 행진곡'이 귀가 떨어질 듯 크게 울려 퍼졌다.
던키와 제이제이는 더 디거스의 연습실로 찾아와서 쉬프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당황한 더 디거스의 리더 연주자는 대답했다.
"아니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라니요... 저희는 비밥 연주자입니다!"
평소 얌전했던 더 디거스의 리더 연주자였지만 지금만큼은 야생을 맴돌던 늑대 한 마리가 사냥을 당한 뒤 동물원에 가두어지려고 할 때 마지막으로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던키와 제이제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여러분들의 음악을 들어본 결과, 코드가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쉬프 대표는 음악 비전공자이니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저는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이 코드를 맞춰 비밥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아무리 비밥이라는 장르를 하더라도 코드는 지키셔야죠. 여기 수석 편곡가인 제이제이가 VP레코드의 전 인력을 총동원해서 음반에 있는 모든 수록곡을 채보할 겁니다. 그걸 가지고 암기하세요. 그리고 매주마다 보고하세요. 얼마만큼 암기했고, 그리고 얼마만큼 암기할 것인지. 완성도는 몇 퍼센트인지까지도요."
"아니... 연습하기도 바쁜데 그런 보고는 또 언제 하란 말입니까?"
더 디거스의 드럼 연주자가 박자를 쪼개던 중 스틱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질문했다.
"이미 더 디거스는 우리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여러분들과의 헐리우드 볼 공연을 성황리에... 아니 최소한 VP레코드에 해를 끼치지 않는 수준으로만 끝내도록 하기 위한 우리의 최소한의 방침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음반에 수록된 음악들은 여러분들의 손을 거쳐서 나왔으니 빠른 시간 내에 암기되지 않겠습니까? 차마 옷을 턱시도로 바꿔 입으시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게..."
더 디거스의 리더 연주자는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아니... 그게... 자네가 얘기하게!"
"무슨... 자네가 얘기해!"
"정말 답답해서 못 살겠구먼! 내가 얘기하겠네!"
더 디거스의 연주자 가운데 양손으로 조용히 컴핑만을 하고 있던 건반 연주자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사실, 우리의 음반에 녹음된 음악은... 우리가 연주한 게 아니요!"
"뭐? 그게 무슨 소리요!!"
던키와 제이제이는 화들짝 놀랐다. 로렌스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우리는 우드쉐딩만 해오다가 이제 막 비밥을 시작해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소. 즉흥적으로 합을 맞춰본 잼 세션이었는데... 어느 날 모리스 대표가 와서는 비밥 음반을 내어보자고 했소. 양복쟁이 스퀘어처럼 보였지만 귀가 솔깃했지. 브레드가 필요했으니까... 근데 우리가 아직 비밥을 하기에는 코드를 다루는데 부족한 모습을 보더니... 금세 다른 캣들을 불러서 코드를 맞추어 왁스를 구워버렸지 뭐야... 음반을 먼저 내고 찹스 따위는 나중에 보충하면 된다고 해서..."
"그럼 그 녹음된 음반이 당신들이 연주한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우리는 비밥으로 소화할 연주 실력이 모자랐던 것이지... 그 음악 자체는 우리가 만든 것이오!!"
"그럼 그 녹음된 음악으로 한 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소?"
"그건 우리의 영혼이 녹아있는 것이 아니니... 전혀 손이 가지 않았소... 우리 보고 그저 세션 맨이 되라는 말인가!!"
"이건 문제가 너무 크군. 지금 얘기는 일단 비밀로 하고 접어둡시다. 자칫하면 이는 문제가 커질지도 몰라요. 일단 연습을 해요. 악보는 곧 가져다줄 테니..."
며칠 후, VP레코드에서는 더 디거스의 음악을 채보하여 악보로 제작을 완료했고, 더 디거스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고 밤낮으로 음악 연습에 매진했다.
그리고 공연 전날, 더 디거스의 최종 예행연습이 진행되었다. 쉬프 대표, 폴, 던키, 제이제이 모두 숨죽인 표정으로 그들의 연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확신을 짓는 표정이었다.
헐리우드 볼 공연날이 다가왔다. VP레코드의 첫 비밥 시장의 진출이라는 점에서 이미 시장에서는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좌석은 매진 상태였다.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 기반의 VP레코드가 비밥에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치가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사람들 간에 논쟁도 과열되고 있었다. 클래식 기반의 회사가 비밥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비관론자들과 그래도 음악이라는 공통점, 또한 스윙에서는 그나마 성공한 세션이 있다는 점에서 비밥에서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모른다는 옹호론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의 끝이 무엇인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무대의 빛이 밝혀졌다. 무대 위에 더 디거스들의 연주를 위한 악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대에 나타난 사람은 더 디거스 연주자들이 아니었다. 그는 VP레코드의 대표, 쉬프였다. 그는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객석을 가득 메워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공연은 취소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희 내부 감사 결과, 업타운 레코드는 회계 부정을 행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조사 과정에서 일부 수록곡에는 코드를 훔친 컨트라팩트 이슈들도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업타운 레코드의 모리스 대표의 사기 등 형사 소송까지도 검토가 필요한 상황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저희는 이 공연에 대해 모든 환불을 책임지겠으며, 관객분들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추가적인 손해배상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세부적인 사항들은 추후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을 통해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쉬프 대표는 관객들에게 90도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무대 뒤에서 사라졌다.
얼마 뒤, 모리스 대표는 사기죄로 고소당했으며 더 디거스 밴드는 해체되었다. VP레코드는 성장이라는 그들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법규를 준수하는 투명한 회사, 리스크 관리 능력이 돋보이는 회사라는 명성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업타운 레코드로부터 인수했던 저작권은 모두 마르스 레코드라는 회사에게로 헐값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약 10년이 지났다.
마르스 레코드는 더 디거스의 저작권 중 미공개 연습 녹음본을 기반으로 음악을 발매했는데 그것이 '프리 재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시장에 떠오르는 신예 레코드사로 거듭났다. 이 소식을 안타깝게 보던 더 디거스의 연주자들은 시골에서 조용히 라이브 카페에서 소소하게 그들만의 우드쉐딩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누군가 와서 명함과 쪽지를 건넸다.
"당신들의 음악과 자유로움이 내 영혼을 치유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당신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연락 바랍니다. - VP레코드 대표 리겐. "
더 디거스는 그들 앞에 누렇게 색이 바래진 채로 놓인, VP레코드에서 작성해 준 10년 전 악보의 제자리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