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먼저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노란 금계국이 군락을 지어 피어 있었다. 몇 해전 늦은 밤 집 근처를 산책하다 노랑 코스모스인 줄 알고 잠시 멈춰서 꽃 이름을 찾아봤었는데, 그때 그 꽃이 여기에 있다. 그다음 해 여름밤, 금계국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잡풀만 무성해 내심 속상했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기분이 새롭다. 꽃말도 '상쾌한 기분'이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처럼 상큼한 초록 니트에 깔 맞춤을 한 C가 초록 구두를 신고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어머 선생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본청에서 봤을 때보다 사뭇 표정이 밝다.
"페이스북에서 기자 그만두기로 했다는 소식 봤어요. 댓글을 몇 번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그냥 만나는 게 좋겠다 싶었죠."
그녀와 처음 대면을 한 건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 교육청 개청 이래 처음으로 성 고충위원회가 열리게 된 배경을 둘러싼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담당 사무관이던 C는 취재 관련 내용이 성 사안이다 보니 공개된 사무실보다는 안쪽에 있는 조용한 회의실이 좋겠다며 카메라 기자와 나를 안내했다.
난 성 고충위원회가 열리기까지 어떤 일들이 진행됐는지 물었고, C는 원론적인 대답조차 해주질 않았다. 그 어떠한 답도 얻지 못할 것이란 걸 예상은 했지만 C는 업무 매뉴얼대로만 취재원인 나를 응대하고 있었다.
결국 관련 기사는 나갔고, 아무래도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지역에선 꽤나 파급력이 있었다. 관련자 중 일부는 해당 사안에 대한 교육청의 징계는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해 '무죄' 판결까지 받았으니 담당 사무관이었던 C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해왔었다.
기사가 나간 이후 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C는 본청이 아닌 시골의 한 학교로 발령이 났다. 발령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척 무거웠지만 난 개인적으로 C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관련 내용을 내게 흘렸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불이익을 받은 건 아닐까? 막연한 추측만 했을 뿐.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퇴직 후 시 낭송가로, 동화 구연가로 제2의 인생을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있는 모습을 SNS를 통해 간간이 엿보며 응원을 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C가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기자 그만두셨으니 기자와 공무원이 아닌 자유인으로 편하게 만날 수 있잖아요. 그간 못다 한 얘기들도 하고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C는 내가 쓴 기사로 인해 여러모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모 교육청 간부는 노골적으로 "임 기자에게 이 얘기 알려준 거냐고..." 대놓고 물어봤고, 관련 사안 조사를 감사과가 아닌 C가 있는 해당 부서에 밀어 넣으며 압박 아닌 압박을 가해 왔던 이도 있었다.
C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왜 참고만 계셨어요?"
"분하고 억울했죠. 하도 분해서 퇴직 후인 지금도 나에게 갑질했던 그 사람의 녹취록을 가지고 있어요."
"저 기자 관두기 전에 제보 주셨으면 취재했을 텐데요."
이 말을 뱉어놓고 난 머쓱해져 웃고 말았다. (기자가 넌덜머리 난다며 그만둔 거면서....)
이 말이 끝나자마자 둘 다 거의 동시에 입 밖으로 나온 말,
"다 부질없어요." "맞아요. 다 부질없어요"
C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을까?
내게 남은 건 뭐지?
매일매일 내 앞에 놓인 과제를 마감 시간에 맞춰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을 내놓았고,
그 결과에 대해 리뷰할 시간조차 없이 또 내일의 취재 거릴 고민하고, 쪼그마한 동네에서... ㅠㅠ 하루살이처럼 살았던 지난날들.
내가 가장 바보같이 느껴졌을 땐 그렇게 집중해서 쏟아낸 어제의 기사가
뭐였는지 가물가물할 때.
'뭐 썼더라??' 환장하는 거다.
장소를 옮겨서도 우리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두 번의 암을 이기고 전원주택에 살며 길냥이들의 집사로, 편안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시각장애인들에게 낭독 봉사로 자신만의 삶을 그려가는 C.
삶에 초연해진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니 밝은 햇살이 쨍하니 비춘다.
열흘 뒤면 문화원에서 평생교육원 동기들과 함께 첫 미술 전시회를 한다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 짓는 C를 보면서 세상은 그래도 살아가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C를 제보자로 오해했다니......'
내게 성 관련 사안을 카톡으로 전달했던 진짜 제보자는
본청에서 날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 척 복도를 유유히 지나가는 탁월한 연기력을 겸비했었다는 걸 모르나 보지?..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