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반대로 생각해 봐.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만약에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면 엄마 그만둔 직후 집 안 공기가 얼마나 어색했겠어? 할아버지는 수술 잘 되셨으니 나으면 되고, 엄만 할아버지 마음이 누그러질 시간이 생긴 거잖아. 안 그래?"
'어! 난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고관절 대퇴골 골절로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하신 아빠가 3주 만에 퇴원해 집에 오셨다. 엘리베이터 안이 그간 병원에서 가져온 짐들로 꽉 찼다. 크고 작은 반찬 그릇과 침구류, 간이 책상 등 흡사 서울로 유학 가는 대학생 자취 집 이삿날 풍경 같다.
입맛 까다로운 아빠는 삼시 세끼 병원 밥을 안 드시고 꼭 점심은 엄마표 특식을 하셨다. 엄마가 드라마 속 장금이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요리를 잘하시기도 했지만, 병원과 집이 도보로 5분밖에 안 걸려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비빔국수가 땅기네. 상추 겉절이 좀 해와" 무슨 아이라도 가진 임산부처럼 까탈스러운 아빠의 주문은 계속 이어졌고, 엄마는 아빠의 병시중을 군말 없이 다 들어주셨다.
입원 직후 며칠간은 엄마랑 교대를 하고 병실에서 말없이 책을 읽으며 거동이 불편한 아빠의 심부름을 했다. 아빠가 회사 이야기는 제발 안 했으면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앉아있었지만 아빠가 먼저 입 밖으로 그 얘길 꺼냈다.
"너 진짜 회사 안 갈 거니?"
"응. 안가. 이제 넌덜머리가 나."
"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건데? 네가 기자 하는 거 아빠한테도 좋고.."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과 재생)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빠! 내 인생이야. 나도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 있어"
"그래 네 맘대로 살아라! 꼴 보기 싫으니 병실에서 당장 나가!"
병실의 싸한 공기는 마치 차고 습한 오흐츠크해 기단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선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나가? 말아? 내가 나간 뒤 그림을 상상해 봐. 그래. 참는 게 맞지 아빠 아프잖아. 그래 10분만 말없이 참고 앉아있자'
내 선택은 옳았다. 아빤 5분도 안 돼서 "침대 좀 올려봐. 아니 조금만 더! 더! 그래 됐어"
손잡이를 돌려 침대 높이를 조절하고 보조 침대에 앉아 있는데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아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왜 저래? 딸이 행복하든지 말든지 신경을 안 쓰는 거야?"
"속상해서 그러지. 안 나가고 잘 참았어 이따 갈게"
그날 병실에서 전에 읽다 말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하'권을 펼쳤다.
천천히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무엇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사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보면 돼.
그리고 공평한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히 알 수 있게 돼.
하지만 모두들 너무 분주해. 재능이 넘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공평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거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하권 中에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막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한 문장은 별이 되어 내 가슴에 콕 박혔다.
"천천히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무엇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사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보면 돼."
그 어떤 이의 위로와 조언보다 큰 힘이 되었던 한 문장.
내가 하루키의 언어를 사랑하는 이유다.
잠시지만 병실 분위기가 어색했던 그날 이후 난 아빠의 마음이 누그러들기를 기다리며 병실에 오랫동안 앉아 있지 않고 잠깐씩만 있다 왔다. 부모님도 나도 서로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신 후 우리 가족 6명은 아니 푸딩이(반려견)까지 일곱은 비로소 완전체가 되었다. 시끌시끌하고 복작거리니 이제야 진짜 사람 사는 집 같다.
아빠는 아직 걷기가 좀 불편해 재활의 시간이 필요한듯하고, 엄마는 오늘 베란다에 노랑, 주황, 빨강 색색깔의 화려한 꽃과 나무로 된 화분 선반을 사 오셨다. 그간 잘 있었니 꽃나무들에게 인사라도 하듯 시든 잎을 떼어주고 물을 주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집안 곳곳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빠 퇴원하는 날, 난 오후 3시 30반 티업 골프 라운딩을 다녀왔다. 선약이 되었던 것이라 염치 불고하고 라운딩을 가는데 내심 어찌나 행복하던지... b가 생일 선물로 미리 사준 옷을 입고 사방이 초록인 폭신폭신한 잔디를 밟으며 걷는 순간에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고민덩어리로 가득 찼던 내 안의 묶은 찌꺼기들을 씻어내 주는 바람.
볼이 잘 안 맞아도 좋고, 잘 맞으면 더 좋고
내가 좋으면 된 거지.
밝아진 나로 인해 내 주변도 환하게 변한다면 더더욱 좋고.
잠들기 전 11살 딸이 잔소리를 한다. "엄마 집에 있는 사람이 왜 더 바빠? 내일은 오후 2시 50분 터 4시 30분까지 나 학원 비는 타임이니까 닭강정 사놓고 기다려. 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