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회의가 끝나자마자 늘 분주하게 취재차에 올라타 누군가를 만나러 가던 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같이 이어지던 나의 루틴과 달리 오늘은 취재 수첩과 와이레스가 아닌 가방에 초록색 수첩과 펜을 챙겨 넣었다. 맥간 공예를 하는 민선희 작가의 첫 개인전을 본 후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서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수첩을 난 '작가노트'라 부르기로 하고, 첫 페이지에 그녀의 첫 전시를 담을 예정이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문화 현장을 취재가 아닌 그녀와의 만남을 오롯이 글로 담기 위해 집을 나서는 길은 구두에 스프링이라도 단 듯 발랄하고 가벼웠다.
울창하게 물이 오른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지나 청주 도심을 지나 도착한 곳은 '갤러리 정스'
청주시 금천동에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상업 갤러리 겸 카페인데 지역에서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기획전을 열어 작가들과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방방마다 느낌이 다른 옛 주택 구조에 시멘트 벽이 그대로 드러난 날 것의 벽면, 매번 다른 작품을 품는데도 그때마다 느낌이 다른 걸 보면 이 공간이 주는 묘한 매력은 전시를 보는 재미를 더하게 한다.
쨍한 주황 원피스에 하얀 카디건을 입고 날 맞아주는 갤러리 관장은 내가 기자를 그만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한 번 안아줄게요" 그녀의 따스한 포옹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걸 보면 굳게 닫혔던 나의 마음에도 서서히 온기가 스미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시장 입구에 걸려있는 은방울꽃이 환한 기분을 더욱 환하게 만든다. 은방울 꽃의 꽃말은 '다시 찾은 행복'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자연 그대로의 보릿대 줄기가 빛에 따라 반짝인다. 물 흐르듯이 나를 시공간 속에 맡기고 발걸음 따라 흘러가는 대로 걷다 보니 오늘 내가 이 공간에 있는 게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작품을 보고 있는데 민선희 작가가 들어온다.
좀 전에 갤러리 관장이 날 따뜻한 포옹으로 맞이했던 것처럼, 나도 그녀를 꼭 안아줬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8년 전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새해맞이 기획전 '맥-보리 펴는 즐거움'을 취재하러 가서이다. 언 땅을 딛고 올라온 보릿대로 작품을 만드는 '맥간 공예' 자체도 생소했지만, 보릿대의 결 따라 자개처럼 반짝이는 그 빛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2016년 1월 문화다이어리에서 처음 만난 그녀>
방송 인터뷰가 처음이라 살짝 긴장한 작가의 표정도, 12 간지 열두 동물이 맥간 공예로 변신한 모습도, 그날 내가 입었던 옷차림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8년 전 그녀의 전시는 매우 특별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오늘, 민선희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그간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온 걸까? 작품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녀의 시간과 노력과 비례해 전시장 안을 꽉 채웠다. 내가 얼룩말을 보고 있는 건지, 녀석이 날 보고 있는 건지, 일정하지 않은 얼룩말의 패턴과 율동의 강렬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싼다.
투명한 상자 안에 담겨 있는 뽀얗고 여린 보릿대 줄기가 시선을 끈다. 작가는 보리 줄기 하나에 마디 하나 밖에 작품에 쓰이지 못해 버려지는 보릿대의 여린 위쪽 부분을 모아 작품으로 만들었다.
어미가 어린아이를 돌보듯 보리 줄기 하나에도 생명을 다루듯 숭고한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는 그녀의 고운 심성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국립청주박물관의 <충북의 산수> 전시에서 사인암에 새겨진 주역의 '택풍대과' 괘에 나오는 여덟 글자를 맥간으로 표현했다.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遁世無悶’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근심이 없다.
주역 '택풍대과' 괘에 나오는 글
홀로 어깨가 다 굳어지도록 보릿대를 펴고 자르고 오려 붙이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들었던 상념을 저만치 밀어 두고, 보릿대에 온 집중을 다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20년을 방송 밥을 먹다 이 줄을 놔버리면 다 무너져버릴 것 만 같았던 내게 꼭 맞는 감동과 위로의 전시.
날 강렬하고 지긋하게 바라봤던 얼룩말은 며칠 뒤면 다가올 말띠인 아버지 칠순 선물로 드릴 예정이다.
보리의 강인한 생명력과 얼룩말의 생동하는 에너지로 오래오래 가족과 함께 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둘러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든 생각 중 하나는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지난 3주간 내게 가장 먼저 손 내밀어 준 사람들은 동종 업계에 일했던 기자 선후배들과 다름 아닌 문화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지역의 작가들이었다.
<문화다이어리>를 취재하며 너무나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봤고,
그 모습이 오롯이 전해져 자신들도
덩달아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고마운 사람들.
이날 갤러리 관장님께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나랑 가운데 한 자만 빼놓고 이름이 같은 임지영 작가의 '느리게 걷는 미술관' , 관장님은 임지영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예술을 바라보고 글로 풀어내는 시선이 어렵지 않고 솔직하고 담백해서.. 내가 그간 알고 지낸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내 손에 책을 건넨다.
따뜻한 위로와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말도 고마웠지만 빨간색 속지에 붓 펜으로 직접 써준 글귀는 날 눈 물 나 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