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되면 멍 때리기 대회에 나가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요즘 종종 든다. 분명 나에게는 자유 시간이란 게 생겼는데 아직 일정한 패턴의 루틴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 내 하루는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간다. 아마도 성격 탓일 게다.
그래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여행지 중 하나가 태국 치앙마이다. 덥고 습해서 많이 돌아다닐 수도 없고, 날씨에 따라 그날 컨디션에 따라먹고 싶으면 먹고, 수영을 하고 싶으면 수영을 하고, 낯선 여행지를 돌아보며 그냥 그냥 멍 때리는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가 둘이나 있으니 여행을 가도 내 의지대로 되진 않겠지만 잠시라도 낯선 곳에서의 계획적이지 않은 여행을 해보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이랄까?
요즘 나의 하루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아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남매가 학교에 가고 나면 푸딩을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골프 연습장에 간다. 점심 약속이 부쩍 많아져 그간 못 만났던 날 찾아주는 고마운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하고 전시나 영화를 보고 책도 좀 읽고 b가 일하는 아뜰리에 b에도 잠시 다녀오기도 하고... 이렇게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회사를 쉬기로 하고 2주는 갈팡질팡 마음이 너무나 분주하더니만 1주는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단 한 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나의 의지가 더해져 무척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오늘은 생전 낮잠을 자지 않는데 침대에서 책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학원에 다녀온 아들이
"엄마 쉬더니 왜 자꾸 잠을 자?"
'잉?!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낮에 잔 건데' 아들의 반응에 적잖이 놀랬는데 더욱 당황스러운 건
"엄마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자도 괜찮아"
'어라~ 이건 뭐지??'
늘 분주하게 뭔가를 계속해오던 엄마가 아프지도 않은데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13살 살 아이에겐 생경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잠깐 존 건데... 자꾸만 소심해져 가는 내 마음들.
친구들과 퇴사 기념& 마흔네 살 생일 파티를 앞두고 화장대에 앉아 스킨을 바르고 있었다. 카톡이 계속 울린다. 요 며칠은 메시지가 와도 중요한 게 아니면 그냥 넘기는데 카톡 알림이 계속 온다. 회사 취재부 막내 후배다.
"빼꼼 (이모티콘) 선배님 집이세요? 선배님 주말에 생일이시잖아요. 케이크 가지고 선배님 집으로 갈게요."
언젠가부터 보도팀원들의 생일이 돌아오면 각자의 개성이 담긴 캐릭터 수제 케이크를 만들어 생일날 함께 축하해 주는 게 관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난달 갑작스레 회사에서 나온 난 사실 6월이 되자마자 '올해 수제 케이크는 못 먹겠네. 애들한테 골프 여왕으로 해달라고 했었는데...' 하며 넋두리를 했었다.
그런데 후배들이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집으로 케이크를 가지고 온 거다. 그것도 친구들과 생일 파티 가기 직전에...
취재 막내 j를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요즘 힘들지?"
"선배님의 빈자리가 크긴 하죠."
"미안해. 정말. 근데 이젠 진짜 돌아갈 수가 없게 됐어"
눈물이 나오려고 눈이 시큰시큰했는데 꾸역꾸역 잘 참았다. 후배의 하얀 차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이놈의 마음이 또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금요일은 생파 가서 불태워 버릴 거야! 술도 2차까지 마시고 오랜만에 노래방도 가서 실컷 노래나 부르고 와야지 하며 다짐씩이나 했었는데 막상 약속 자리에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는데 한동안 옆자리에 놓인 케이크만 멍하니 바라본다. 조심스레 케이크 문을 열자 감동의 온몸에 퍼져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록에 문구도 끝내준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골프 여신 가영 선배! 근심은 벙커에 행복은 홀인원!> 이것도 모자라 부제는 <골프 여왕 꿈꾸는 40대 미녀 기자 '화제'>이다.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생애 최고의 케이크를 받은 44살 생일에.
열일곱 살 때부터 친구들의 생일이면 열 명 가까이 20년을 모이던 친구들도 이제 달랑 네다섯 명으로 줄었다.
늦게 결혼한 탓에 아직 아이가 어려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친구부터 해외에 가 있는 친구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점점 모이는 숫자는 줄지만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해진 저마다의 인생을 풀어놓기에도 이 밤은 짧으니까.
난 원래 술을 먹으면 텐션이 더 높아져 더 발랄해지거나 기분이 몹시 좋아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노래방에서 노랠 하는데 눈물이 나더라.
꼭 옛날 우리 90년대 내레이션이 들어간 가요처럼, 전주가 나올 때 친구들한테 마이크에다 대고 이렇게 울먹이며 얘기했다.
"얘들아 나 이제 정말 괜찮아져서 얘기하는데 지난 한 달은 나 너무 힘들었어. 내가 원래 진짜 힘들 땐 잘 얘기 안 하잖아. 이제 진짜 괜찮아져서 너희들한테 나 그랬다고 내 마음이 그랬다고 얘기하는 거야."
매년 유난스럽게도 음력 양력 다 챙기며 생일 주간을 보냈던 나인데,올해는 똑같은 숫자가 두 번 겹쳐서 인지 마흔넷의 생일은 다른 때와 달리 조금 더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