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란 딱지를 떼고 겨우 모든 게 생소하기만 한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내가 입학한 시골 중학교는 진짜 오래 다닐 곳이 아니란다. 잠시 입학을 했다 아빠의 직장을 따라 도시의 중학교로 전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3월 한 달이 거의 지날 무렵 청주의 한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엄마 손을 잡고 학교 근처 교복집을 갔는데 교복 물량이 딸려 3~4주는 지나야 교복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교복 집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학교에 사정을 얘기하자 교복을 구할 때까지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다니라는 얘길 들었다.
중1 신입생 치고는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에, 그 당시 내 키가 165cm였으니까. 비쩍 마른 몸. 귀밑까지 오는 짧은 단발머리를 한 거울 속 내 모습은 초록색 주름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사뭇 달라 어디에 있든 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탓에 내가 전학 온 아이라는 건 웬만하면 다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전학 온 지 3일 만에 본 전국모의고사에서 3등인가를 해서 반 아이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시골 동네에서 전교 어린이 회장을 할 정도로 나름 똑똑함을 자부해 온 나인데 전학을 온 뒤로 은연중에 주눅이 몸에 배어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공동체가 주는 압박이랄까? 흰 티에 청바지만 걸쳤을 뿐인데 난 입고 있는 옷 하나로 소속감과 연대감 없는 외계에서 온 생물체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교복이 도착했다.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이제 나도 진짜 이 학교 학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시골에서 온 키 크고 마른 예쁘장한 아이란 이미지도 이제 잊힐법했는데 수학 시간마다 k 선생은 내가 시골에서 온 촌뜨기임을 기어코 끄집어냈다.
"어이 거기 너! 촌에서 전학 온 애! 이름이 뭐더라? 앞에 나와서 문제 물어봐."
스머프에 나오는 악당 마법사 가가멜 같은 숱 없는 머리에 시커먼 얼굴색. 예순 가까이 돼 보이는 외모도 진짜 싫었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크윽크윽 캬!' 창밖으로 몰아서 내뱉는 찐득한 가래침 소리는 정말 죽을 만큼 싫었다. 그런데 그 가가멜이 매번 수학 시간마다 날 부르는 것이다.
레퍼토리도 바뀌지 않는다. "촌에서 온 촌년! 너 이름이 뭐였지?"
매번 수학 시간마다 묻고 또 묻는데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더라. 시골에서 전학 온건 맞지만 촌년이란 말이 왜 이렇게 듣기가 싫던지.
창밖으로 매미 소리가 귀가 찢어질 정도로 울던 덥고 습한 날이었다. 수학 시간은 왜 이렇게 자주 돌아오는 걸까? 그런데 그날은 가가멜이 웬일인지 촌년을 부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이 나의 가슴 위에 단 초록색 명찰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네 이름이 뭐였더라'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었던 그의 검은손이 교복 블라우스에 닿자 내 팔뚝에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더럽고 그지 같은 기분이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가가멜의 가래침 뱉는 소리와 내 명찰을 향하던 지내 같은 느릿느릿한 검은 손길은 몇 차례 더 계속됐다. 이런 기억들은 왜 이렇게 생생히도 오래가는지 마흔넷이 된 지금도 매미가 무섭게 울어대면 그때 일이 떠올라 멀미가 올라온다.
집에 와서 혼자 우는 일이 많아졌다. 평소 엄마와 가까웠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엄마는 내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학교 안 가면 안 돼?"
엄마는 그저 내 얘길 가만히 들어줬고 그날 난 엄마 품에 오랫동안 안겨 많이 울었다.
하지만 아빠는 일단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어릴 때 '어린이 반상회'란 걸 만들어 전국 방송을 타고 kbs 본사까지 올라가 생방송으로 어린이 리포터까지 했던 똘똘했던 딸 입에서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거북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돼서 일까?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집에 들어선 아빠는
"도대체 뭐가 문젠데? 그래서 그 선생이 너한테 입을 맞추기를 했어? 널 때렸어?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하며 날 몰아세웠다.
"여보 그게 아니잖아. 한참 예민할 나이인데... 얼마나 충격받았겠어!"
"됐어. 때려치워. 그런 것도 못 이겨내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엄마와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왜 문제를 사서 만드냐는 두 분의 입장은 팽팽하게 갈렸고 언성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옥 같은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욕실로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흐느껴 울었다. 샤워기의 물이 머리와 몸을 적셨고 내 눈에서도 엄청난 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었다. 물소리 너머로 부모님 싸우는 소리까지 더해져 내 귀에는 큰 진공관 앰프가 달려있는 것만 같았다.
"너 문 열어! 문 열라고! 도내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그리고 한 참 뒤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을 나온 난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어버렸다.
욕실 문을 경계를 두고 억겁의 세월이 흐른 것일까?
그날 이후 난 세상과 단절한 채 말 문을 닫고 말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학교를 한 달 정도 안 갔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말 문을 닫아버린 딸과 마주한 엄마는 슬픈 얼굴로 그저 날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 무릎을 베고 침대에 누운 딸은 자기 엄마가 엄마인 줄 모르고 누구세요라고 되묻는다. 핏기 없이 하얀 얼굴로 그저 내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던 그 보드라운 손의 촉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 모든 게 딸에게 화를 낸 자신 때문이라며 부쩍 아빠의 술 먹는 빈도는 늘어갔고 엄마는 더욱 수척해져 갔다. 어느 날은 엄마 손에 이끌려 한약방에 가서 침을 맞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정신신경과에 가서 상담을 했던 기억도 가물가물 난다. 각종 검사를 해봐도 딱히 이렇다 할 이상은 없어 그때 병원 의사 선생님께서는 슬픈 발라드보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같은 좀 신나는 노래를 들으라고 권하셨다.
모든 게 세세하고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냄새와 부모님들의 슬픈 표정, 어린 남동생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누나를 바라보는 시선, 세상의 풍경들이 조각조각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중에 부모님께 들은 얘기로는 '선택적 함묵증' 증세가 반년 정도 이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