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떠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사표를 던진 순간 '태국 치앙마이에 갈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내 이름 林佳英이 수풀에 아름다운 꽃이라서 그런지 난 파란 바다보다 편백나무가 우거진 숲이 더 좋았다.
숲이 주는 풀 향기가 생기가 되어 내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는 그 기분! 그 느낌이 좋다. sns에 올라온 치앙마이의 숲에 꼭 가고 싶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스콜이 지나간 후 나무에서 나는 숲 냄새를 꼭 맡고 싶었다.
치앙마이의 숲에서 들숨날숨을 크게 내쉬면 40여 년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쌓여있던 묵은 찌꺼기 같은 감정들이 싹 씻겨 내려갈 것 만 같았다.
그런데 내가 정작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치앙마이가 아닌 베트남의 냐짱이었다.
몹시 더위를 타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 내내 걷는 일이 많을 텐데 7-8월에 우기인 치앙마이를 가는 게 맞는 걸까 몇 번을 고민하다 내가 살고 있는 청주에서 냐짱으로 떠나는 비행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퇴사 후 손꼽아 긴 여행을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내게 더 큰 깨달음을 주기 위한 신의 계획이었을까?
회사를 그만둔 직후부터 큰일이 빵빵 터졌다.
아빠의 고관절 대퇴골 골절 수술,
b의 갑작스러운 입원 등 석 달이란 짧은 기간 동안 감당하기엔 사실 좀 벅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하나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아빠를 돌보기 위해 20일간 병실에 있었던 친정엄마의 빈자리를 온전한 주부가 되어 알아가는 과정.
콩나물국, 된장국 끓이는 법, 애들 하원 이후 간식 챙기기 등 초보 주부가 겪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반복하며 혼자 웃는 일도 많았다.
사실 재밌기도 했다. 줄곧 부모님 품 안에서 자라 살림에는 영 소질이 없던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아가는 재미.
평생 낮잠이나 늦잠이란 걸 모르고 살던 내게 잠들지 않았는데도 실눈 뜨고 침대에 누워 뭉그적거리는 시간들도 절로 웃음이 날 만큼 행복했다.
고등학교 가서 강의도 한 번 하고 틈틈이 글을 쓰며 전자책 발간도 하고, 취미 생활인 골프와 첼로도 쉬지 않았고, 백수지만 백수 같지 않은 바쁜 나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b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한 시기 내가 사는 동네인 오송 수해까지 터져 내 멘털에 조금씩 균열이 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수술실에서 무사히 나온 직후부턴 미친 사람처럼 병실에서 항공권을 검색했다. 어디라도 떠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을 잠재워야만 했다.
b의 입원 5일 중 3일은 책을 읽거나 b를 관찰하며, 병원 다인실의 풍경을 글로 쓰며 보냈다. 하지만 b가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와 앞으로 약만 잘 챙겨 먹으면 사는데 지장이 없을 거란 의사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나선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속전속결로 항공권을 결재하고 엄지손가락이 아프도록 검색에 검색을 거쳐 호텔과 리조트, 픽업 차량, 투어 일정 등을 정했다. 대단한 추진력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간 b가 못 돌아오면 어떡하지부터 난 회사를 관뒀는데 b가 계속 아프면 어쩌지 등
만약이란 가정하에 생긴 안 좋은 상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을 때의 스트레스 덩어리들을 날려 보내야만 했다.
근데 이상한 건 항공권을 끊고 여행을 코앞에 두기 직전까지도 아이 같은 설렘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대게는 부푼 솜사탕처럼 몸 전체가 설렘으로 부풀어 올라 둥둥 떠나 녀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거다.
아마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석 달을 놀아보니 온전한 주부로 살기에는 내가 이쪽 세계에 소질이 없다는 걸 절절하게 깨달았고 효율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일을 하는 게 맞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휴가지 책으로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를 골랐다.
예전에 회사 생활이 힘에 부쳐 지칠 즈음 백 작가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고
거짓말처럼 아주 행복해졌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벌써 반쯤 읽어버렸는데 책장이 넘어가 게 아까울 정도로 재밌는 책은 오랜만이다.
언니의 사고로 슬퍼하던 주인공에게도
언젠가는 행복이란 게 찾아오죠.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에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에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 중에서
이 부분을 읽을 즈음 비행기가 좌우로 흔들려 무서운 마음에 딸의 손을 꼭 잡았는데, 문장이 주는 밝은 에너지가 솟아나 금세 비행의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힘든 곱이곱이를 지나 계속 버티고 나면
결국에는 자꾸자꾸 나아지는 게 인생인 것 같다.
내가 그래온 것처럼...
퇴사 후 지난 석 달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무탈히 잘 지내온 것처럼... 고단함 뒤에는 냐짱에서 멋진 8일이 펼쳐질 것처럼.
이 글을 적고 나니 오랜만에 여행에도 무던했던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