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공예비엔날레 '어마어마 페스티벌' 토크콘서트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지.
남은 연차 소진을 포함해 석 달째 놀고 있는 내게 지난 6월 첫 고등학교에서 진로 특강이 들어왔을 땐 여느 첫 경험이 그렇듯 설레고 신박한 기분에 휩싸여 그저 그 시간이 즐거웠다면,
이번에는 정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난 9월 1일부터 시작된 청주공예비엔날레 '어마어마 페스티벌'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아 달라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내 몸 구석구석에 엔도르핀이 돌았다.
나의 고향, 청주의 대표 행사인 청주공예비엔날레 첫 회부터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리포터로 취재기자로 현장을 누볐던 터라 지근거리가 아닌 오롯이 관람객으로서 비엔날레를 보기에 섭섭한 마음이 들 즈음 온 전화였다.
취재기자로 오랜 기간 길들여오다 제대로 된 진행을 한지가 언제였던가?
20년 전쯤 지역 민방에서 외국인과 함께 충북의 관광지를 소개했던 코너 '헨리와 가영이의 시간여행', '네트워크 고향이 보인다' 등 cjb시절의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 본다.
그 시절 경험만을 갖고 덤비기에는 좀 불안해 유튜브에서 이금희 아나운서의 조리 있고 차분한 진행과 유쾌하고 입담 좋은 김미경과 김창옥 강사의 토크콘서트를 찾아서 봤다. 난 어떤 분위기로 1시간 남짓을 이끌어갈까?
전자와 후자 중 어쭙잖은 유머를 하려다 낭패를 보기보단 작가와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하듯 풀어내는 전자의 차분한 진행을 택하기로 했다.
행사 당일 메이크업을 따로 받을까 고민하다 진한 화장이 안 어울릴뿐더러 자연스러움이 최고야란 생각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평소 하지 않던 마스카라를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정성스럽게 바르고 바지 정장을 입을까 스커트를 입을까 고민하다 원피스를 입기로 정하고 드는 생각...'아... 살이 너무 쪘어...'
그래도 머리만큼은 신랑 찬스를 쓰기로 했다. 헤어디자이너인 b는 집중을 하거나 머리 할 때 입을 쭈욱 내미는 습관이 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앙 다문 입을 쭉 내민 채 드라이기로 내 머릴 만진다. 평소보다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져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본인은 행사에 못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넌다.
행사 시작 1시간 전에 미리 토크콘서트 장소인 청주 동부창고 36동 빛내림홀을 둘러본다.
전시홀 벽면에는 토크콘서트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작가님의 작품을 가만히 보며 그분을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을까 상상해 본다.
생각보다 아담한 홀이라 긴장감은 팍 줄었는데 행사 시작 30분 전까지도 관람객이 별로 없다. 한결 편안해진 내 마음과 달리 다소 실망하는 작가님들의 표정을 보고 "오늘 더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됐어요. 좋은 시간 함께 만들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몇 날 며칠 밤새워 개인전을 준비한 작가의 오프닝 날 정작 관람객이 없어 썰렁하다면 이런 기분과 엇비슷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
다행히 토크콘서트가 시작되자 빈자리가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더욱 감동인건 아직 오래 걷기 불편하신 아버지가 엄마와 아이들과 함께 날 지긋이 바라보고 계신다. 가족과 눈이 마주치면 혹시나 떨릴까 봐 잘 안 쳐다봤는데 우리 딸 행사 끝나고 이야기한다. "엄마 나 좀 보고 웃어주지 그랬어"
재개발로 서서히 옛 정취를 감춘 청주의 원도심 사직동을 기록하는 강석규 작가는
이제는 잊혀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준비된 화면 속 작가님 사진을 보고 난
쓰러지고 불타버린 집에서도 초록의 넝쿨 나무가 올라오는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전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나는데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다 무너져버리는 집일지라도 난 꿋꿋하게 초록의 싱그러움을 뽐내겠어! 이런 느낌이에요.
라고 멘트를 했다.
가장 먼저 철거가 된다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
높고 빡빡한 아파트 숲 인근에는 청주에 오랫동안 살아온 나도 모르는 그런 공간이 자리해 있었다.
미리 받은 이 사진을 보면서도 작가님 설명을 듣기 전까진 그냥 옛날 창문 비가림 용도 일 줄 알았는데 환풍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강석규 작가님의 사진을 보면 지금은 리모델링으로 사라진 옛 외갓집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여람 방학이면 봉숭아를 보석 같은 명반과 함께 조약돌로 빻아 손톱 밑에 얹고 비닐로 칭칭 감아주셨다. 그런 다음날 붉게 물든 손톱을 보며 좋아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걸 보면 사진에는 시간을 여행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나 보다.
소녀스런 말투와 톤으로 나지막이 말문을 이어가는 박은영 작가님 사진 속에는 청주 정북토성 아름다움이 한껏 묻어났다. 수많은 별이 총총 박힌 까만 밤의 정북토성을 찍었을 때 작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연출된 텐트 두 개와 트라이포트 사진기를 챙기면서도 전혀 무거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작가.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처럼 작가들은 아름답게 사진에 미쳐있었다.
청주의 문화제를 기록하는 이종남 작가는 메이킹 포토가 아닌 테이킹 포토를 고집한다. 연출되어 만들어진 사진이 아닌 기록 자체로서의 사진.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청주의 역사를 꾹꾹 사진으로 담는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했던 청주문화재야행에서 보았던 중앙공원의 망선루와 청주의 젖줄 무심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지금 모습과 같을까?
사진작가들과 토크콘서트를 진행하면서 왠지 모를 아련함과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잊힌다는 것,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단상과 함께
세월이 흘러도 누군가가 추억할 수 있게 자신만의 작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작가들.
이런 분들과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나에게는 값진 인생의 한 페이지로 기억될 것이다.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어마어마 페스티벌’ 토크콘서트는 다음 달 7일까지 매주 토요일
동부창고 36동 빛내림홀에서 오후 3시부터 진행됩니다.
2회 차 토크콘서트에서는 양동엽, 김갑용 도예가와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시간 되시면 보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