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말 수도 없고 조용하던 엄마 얼굴에 어쩌다 활기찬 생기가 드리워졌던 날은 어린 나의 손을 꼭 잡고 청주로 공연 보러 오는 날이었다. 지금도 별반 나아지진 않았지만 충북괴산의 시골 동네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엄만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주에서 볼만한 공연이 있으면 꼭 나와 함께 보러 나왔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굽이굽이 펼쳐지는 산새를 따라 한 없이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이 난 좋았다.
그때는 나무마다 까치집이 참 많았는데 스멀스멀 멀미가 올라올 때면 하나, 둘, 셋, 넷... 청주에서 괴산까지 이어지는 까치집을 세면서 차멀미를 달래곤 했다.
평소에는 티셔츠 바람에 주로 맨 얼굴로 계셨던 엄마도 청주로 공연 보러 가는 날이면 정성스럽게 단장을 했다. 설렘 가득한 소녀 같은 얼굴로 화장대 앞에 선 30~40대의 엄마의 앳되고 고운 얼굴은 참 예뻤다.
청주로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면 엄만 내 머릴 예쁘게 땋아주셨다. 가장 아끼는 원피스를 입고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은빛 장발에 굽슬거리는 미샤 마이스키를 처음 보던 날. 지판을 넘나들며 중저음의 고혹적인 첼로 선율을 연주하던 그의 무대는 감동을 넘어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늘 내 마음 언저리에 깊이 남아 성인이 돼서도 첼로를 향한 막연한 로망으로 남았다.
미샤마이스키의 연주는 환희에 찬 기쁨보다는 애잔한 슬픔과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기 위한 열정 섞인몸의 언어로 기억 됐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첼로에 대한 단상 때문인지 살면서 좌절과 실패의 순간을 맛보았을 때 가장 먼저 첼로를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으며 나에게 첼로와 함께하는 시간을 선물한다.
엄마의 문화 예술을 향한 지적 호기심은 시골 아이였던 내게 이집트 미라 전시부터 앵그르에서칸디스키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유명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이런 모녀의 우아한 나들이는 나의 결혼 전까지 연례행사처럼 이뤄졌다. 그런데 연년생이나 다름없는 남매를 낳고 주중이면 일에 치이고 , 주말이면 독박 육아에 빠져 점점 그 시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의 남편인 b는 미용사였기에 주말이 되면 더 바빠져 친정 부모님과 함께 근처 관광지를 돌거나 웨건 카트에 두 아이를 싣고
각종 체험행사를 쫓아다니며 파절이가 되곤 했다.
문화부 기자를 하며 취재 현장을 다닐 때면 종종 엄마와 함께한 우아한 외출이 떠올라 그리웠는데
언젠가부터 내가 있던 그 자리에는 엄마의 언니들인 나의 이모, 박 자매들이 있었다.
내가 아닌 이모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공연 전시, 여행을 다니는 엄마를 곁에서 보면서
부러운 마음과 동시에나의 독박 육아는 언제까지 지속돼야 하나 넋두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퇴사란 걸 하면서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란 게 생겼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엄마와 함께 지역의 전시를 보러 다녔다. 그 옛날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집에 있을 때와 달리 한껏 차려입은 엄마의 모습은, 작품을 골똘히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은 칠순을 앞둔 여자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릴 적부터 나와는 달리 말수가 적은 엄마가 불만일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말없이 작품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