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배가 고프다는 아들의 성화에 주말인데도 조금 일찍 눈을 떴다. 비몽사몽에 계란을 그릇에 풀어 휘휘 젓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에 기포가 송송 올라올 즈음 전화가 왔다.
"작가님 어쩌죠? 오늘 토크콘서트 하시려던 작가님 중 한 분이 갑자기 못 오신데요."
청주공예비엔날레 공예팀에서 온 전화다.
"일정상 취소는 안되고 두 분 중 한 분 하고만 가능하실까요?"
"네.. 어쩔 수 없죠. 한 분 작가님께도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란말이가 맘처럼 잘 뒤집어지지 않는다.
그간 청주공예비엔날레 어마어마 페스티벌 토크콘서트 진행을 두 차례 했다. 이번이 세 번째라 1,2회 때보다 마음이 여유로웠었는데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큐시트를 뒤적거리며 멘트를 수정한다. 못 오신다는 작가님의 인터뷰를 덜어내고 그만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잠시 골똘히 고민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억지로 질문 가짓수를 더 늘리기보단 이야기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가자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토크콘서트 관람객도 관람객이지만 난 무엇보다 이번 토크콘서트는 작가 자신이 그동안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이 시간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인생을 솔직 담백하게 들려주는 자리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토크콘서트 시작 시간보다 40분가량 일찍 도착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시작 10분 전인데도 객석이 썰렁하다.
첫 회때 이미 한 차례 경험한 터라 막막함과 쓸쓸함은 그전에 비해 좀 덜했지만 20여 년이 넘도록 섬유 작가로서 여성기업인으로서 피나는 노력을 해온 작가님을 뵈니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히려 관객이 적어서 부담 덜 되고 좋아요" 하시며 환하게 웃는 작가님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금세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한 다짐.
관객이 적으면 어때?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 집중하고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의 이야기 속으로 몰입해 보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는 일 자체로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흥겨운 판소리 식전 공연 후에 시작된 송재민 섬유작가와 함께 한 토크콘서트.
지역을 넘어 국내 섬유계에서 전통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송 작가는수많은 개인전과 그룹전 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박람회 등에 참가해 우리나라 섬유를 세계에 알린
충청북도 명장이자 공예명인이다. 섬유공예 브랜드 '까마종' 대표이시기도 하다.
빼곡하게 적힌 작가의 프로필 속에는 그간 묵묵히 작업을 하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작가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났다. 남들보다 눈에 띄게 작은 체구로 명장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섬유 공예 이야기를 하는 내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며 작가가 얼마나 이 일을 사랑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전 과목 중 유독 성적이 안 좋았던 가정 실기 시간, 두툼한 손으로 작은 바늘귀에 실을 넣는 것도 힘들었고, 첫째 아이를 임신한 후 태교를 한다며 구입했던 바느질 키트도 고스란히 친정엄마에게 돌려보냈던 나로서는 손으로 무언가를 잇고 꿰매고 자르는 일 등을 해내는 송재민 작가가 더 대단해 보였다.
섬유작가 송재민 作
"모나고 각진 세상을 작품을 통해 조화롭게 만들고 싶었어요.
내 키의 곱절이 넘는 대형 설치 작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작업을 하는 내내 더 크게 더 멀리 자유롭고 싶었어요.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자유 의지,
그간 세상에서 겪은 힘듦과 슬픔을 작품으로 녹여내다 보면 어느새 힘들었던 나 자신도
힘을 내서 살아가게 되더라고요. 내가 섬유 공예를 하는 이유예요."
토크콘서트 때 하신 말씀의 요지를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기에 워딩이 100% 정확하진 않아도
콘서트 내내 작가가 말한 작품의 주제는 한결같았다.
각진 세상을 작품을 통해 아름답게 조화롭게 표현해 내는 일.
작품의 모티브로 등장하는 나비는 송재민 작가 자신이며, 틀 안에 갇혀 살지만 어디든지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몇 번의 순간순간 벅찬 마음이 감동이 되어 밀려왔다.
수많은 관객 속에 홀을 가득 메우는 우렁찬 박수 소리는 없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 내렸다. 신이 작가에게 보내는 자연의 선물인 것처럼.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슬럼프란게 찾아오고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넉 달 전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멈춤하고 있는 사이 토크콘서트 진행을 맡게 된 내가 그랬다. 일시 멈춤(Pause) 버튼을 꾹 누르고
천천히 아무런 생각 없이 살고 있었던 나에게 작가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열정 어린 삶의 기록을 들여다보게 한 이 시간들,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
충청북도 명장, 여성 기업인, 섬유 작가로 지금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비결을 작가에게 물었다.
"항상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요. 오늘 하루, 한 달의 계획, 일 년 동안 뭘 하겠다 등
전 늘 계획을 세워요. 자신과의 약속, 계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그럼 잠시 멈추면 돼요. 그러다 나아지면 다시 시작하면 되고.."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바지와 구두가 많이 젖었다.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비처럼, 그 비에 젖은 옷처럼 내 마음도 촉촉이 스며들었다.
그녀와 함께한 1시간 반 동안.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았는데 송재민 작가에게 사진 한 장이 왔다.
송 작가의 고향은 보은군 회인이란 곳인데 오늘 밤 회인에서 문화재 야행이 열린다고 한다.
토크콘서트를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고향에서 하는 문화행사에 참여하러 간 것이다.
고즈넉한 한옥 마을 빨랫줄에 파란 하늘을 닮은 쪽빛으로 염색한 천이 달보다 더 환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