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딸은 중국인 입맛인가 봐. 어째 입맛 열면 마라탕 아니면 탕후루야?"
이번 달 신용카드 내역서를 보니 딸의 성화에 못 이겨 하루가 멀다 하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흔적이 역력하다. 마라탕과 함께 시킨 꿔바로우를 접시에 담고 나니 덩그러니 빈 플라스틱 통에 자국 남은 고추기름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게으름을 떨었더니 어느새 재활용품 바구니에 플라스틱이 잔뜩 쌓여있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 사회의 개인화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환경위기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지구촌 재난 소식이 곳곳에서 잇따르면서 어쩌면 우린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도 서서히 무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친구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엊그제 뉴스에서 봤던 모로코 지진 사망자가 3천 명을 육박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우린 서로의 자녀들에 대한 미래를 걱정했다.
"우리 세대는 웬만큼 거의 다 해봤잖아. 근데 우리 애들 때는 그럭저럭 넘어간다 치더라도 우리 애들이 아이 낳고 그 아이들이 사는 지구는 정말 위험할 것 같아. 매일 무너지고 폭파되고 물이 넘쳐나고... 끔찍해."
"그래 맞아 올여름은 정말 끈질기게 덥고 습했잖아. 우리나라도 동남아 기후가 된 것 같아.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어"
풋풋했던 연애 이야기부터 부질없는 연예인 걱정 등 지나칠 정도로 자잘하고 소소했던 우리의 대화는 어느새 묵직하고 무거운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마흔이 넘어서일까? 여고 동창과 가볍게 오가던 수다는 세월의 무게와 함께 지구 환경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중년 아줌마들의 대화로 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열렸던 청주아트페어에 갔다가 반가운 작가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전시장을 둘러봤다. 그때 뵈었던 한희준 작가 개인전이 곧 열린다는 소식에 작가님께 꼭 보러 가겠다는 말을 했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씨앗이 되어 내 머릿속에 심겼나 보다. 전시 개막 며칠 전부터 전시회를 언제 보러 갈까 하는 마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10월이 되면 내 일상에도 변화가 좀 생길 것 같아 내게 주어진 하루란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이면 오늘 하루 일과를 시간대별로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한다.
운 좋게 00 콘텐츠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선정돼 오전에는 출품된 작품 심사를 하고, 늦은 오후 집에 들어갈까 하다가 머릿속에 떠다니던 전시회 씨앗을 꺼내본다.
차창 밖으로 가랑비가 뚝뚝 떨어진다. 전시가 열리는 청주 도심의 '예술곳간'을 처음 간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엔 메말랐던 가슴에 습기가 더해져 좀 느슨해지기 마련인데, 오늘 같은 날이 딱 작품 보기 좋은 날이다. 무엇이든 애매한 것보단 정확해야 하고, 무작정 떠나기보다는 계획적인 여행을 선호하는 나로선 내가 정해놓은 나름의 기준과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런 흐린 날이 좋다.
비가 와서 인지 전시장에 사람이 없다.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혼자 보는 전시는 뭔가 대우받는 기분이 든다. 작품에게도 공간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님과 작품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Plastic] 인간과 환경사이 한희준 작가의 9번째 사진전.
전시 주제가 플라스틱이어서 일까? 아니면 내 후각이 예민한 걸까? 코끝으로 플라스틱 냄새가 전해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전시의 첫 느낌은 "밝아서 참 좋다~!"였다.
인간과 환경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없이 우울해지지도, 슬퍼지지도 않는 밝고 환한 색감이 주는 분위기와 따스함.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환경 위기와 생태계 파괴 등을 말하면 대부분 심각하고 심오하고 어둡게 표현되잖아요.
환경적인 문제를 무조건 어둡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게임하듯이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싶었어요."
한희준 作
환경을 작품으로 풀어나가는 작가의 관점에 무척 공감이 갔다. 이러다 곧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더럽고 어둡고 우울한 이 시대 환경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환하고 밝은 방법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회화 작가 하셔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 색의 사용은 노력보다는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된다고 믿는 편인데 색을 표현하는 한 작가의 감각은 탁월했다.
작가는 디지털 작업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아노 타입과 검프린트 기법으로 인화하는 초창기 사진기술을 활용해 플라스틱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의 기록을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플라스틱 석유가 물 위에 한 방울 떨어졌을 때 분해되는 빛깔을 5시간 동안 기록한 작품을
어릴 적 내가 자주 했던 게임 중 하나였던 '테트리스'처럼 형상화했다.
한희준 作 골드와 블루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 속 플라스틱의 분해 물결은 취재를 다니며 언젠가 보았던 대청호의 빛깔과 닮았다. 장마철 폭우가 지나간 뒤 석유와 쓰레기가 부유했던 그 호수에서 보았던 그 빛깔.
한희준 作 한희준 作 작가는 1.8L의 플라스틱 수많은 물병을 열을 가해 찌그러트린 뒤 그 병을 다시 무언가로 칭칭 감아 매달아 놓았다. 마치 실에 감긴 누에고치처럼. 애벌레가 누에고치가 되어 나비가 돼서 훨훨 세상을 향해 날아가듯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중의적으로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꼽히는 플라스틱도 다음 세대에는 새로운 물질로 재탄생하길 바라는 플라스틱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과 우리가 한 번 쓰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플라스틱도 결국 돌고 돌아 결국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경고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미네랄, 천연암반수 등 우리 몸에 이로운 것을 담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환경을 위협하는 적으로 치부받는 플라스틱이 처한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작가는 사용하고 버러 진 플라스틱이 착한 물질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플라스틱! 너 많이 억울했겠다"
한희준 作 한희준 作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환경을 위한 실천을 몸소 실행에 옮기고 익숙해지기까지가
얼마나 힘이 든 지에 대해
한 몸처럼 얽히고설켜있는 인간과 환경 사이에 대해
작가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크고 강력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