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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Sep 26. 2023

갑자기 슬픔이 찾아오면 난 글을 써

사랑하는 독일이모에게


내 기억 이모의 첫인상은 강렬한 태양과 같이 빛났다. 갈색 웨스턴 부츠에 에메랄드빛 가죽 재킷, 내 얼굴보다 큰 선글라스를 끼고 Hallo (하로)~!! 하며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던 그녀. 162cm가량의 엄마도 그 당시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 엄마보다 반 뼘 정도 더 키가 큰 이모는 굵직굵직한 선과 동양인치고는 제법 큰 홑커플의 예쁜 눈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엄마 밑에서 자란 내게 이모의 밝고 넘치는 쾌활함은 당시 예닐곱 살이었던 내게도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린 그녀를 독일 이모라고 불렀다.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10년 넘게 하던 이모부를 따라 먼 타국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뒤늦게 첫 아이를 낳고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모는 어린 내게 가끔 독일말을 가르쳐 줬는데 마흔이 넘은 지금도 이모의 까랑까랑하던 그 독일식 인사가 가 가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따라 해 봐. 구텐 모르겐~ 당케 쉔~!"

"땡큐가 아니고 당케 쉔?"

특이한 억양에 하얀 치아가 훤히 다 드러날 정도로 다소 오버해 '당케 쉔'을 가르쳐주던 그녀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흘렀다.






그런데 저기 내 눈앞에 있는 사진 속 이모는 핑크색 셔츠를 입고 알이 큰 갈색 선글라스를 낀 채 말없이 웃고만 있다.

탐스럽게 핀 하얀 국화꽃 속에 파묻혀 날 보고 웃고만 있다.

분명 내 귓가에는 "가영아~하로!!" 하며 웃는 이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이모의 목소리는 음소거된 채 남은 자들의 울음소리만 들린다.


"미래 우리 모습이잖아. 나쁜 계집애... 뭐가 그리 급하다고 언니보다 먼저 가냐?"


허망하게 혼잣말을 하다 소리 내어 울다 언제인지 모르는 그녀와의 기억을 중얼중얼 읊조리는 박 자매들 사이에 끼어 이모를 멍하니 바라본다. 몸에 있는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간 걸까? 잠시 어지러워 빈소 벽에 몸을 기댄다.


벽이 차갑다. 차갑다. 차갑다.

이모는 지금 이보다 더 차갑고 시리고 깜깜한 안치실에 지금 누워있는 걸까?

아니면 드라마 속에 나온 한 장면처럼 어디선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보고 있는 걸까?

분명 또렷하게 가족들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가만히 손을 다가가면 허공을 가르는 손짓,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 너머에 있는 걸까?


기자를 그만두기 전, 내가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최근 3~4년 간 난 매일 출퇴근 길에 이모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좌회전 우회전 한 번 없이 줄곧 직진으로 20분가량 달리면 회사가 나왔던 그 길. 복잡한 세상을 뒤로하고 아이 엄마도, 아내도, 기자도 아닌 오롯이 내가 되어 이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관급공사 납품비리 관련 취재를 시작하고 회사에 장정의 남자들이 몰려왔을 때, 상사에게 거친 욕을 듣고 손이 벌벌 떨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아무도 없는 교회 예배실에 찾아가 목놓아 울면서 기도했던 그 모든 얘기들을 이모에게 털어놓았다.

교회 권사인 이모에게 나의 힘듦이 신앙으로서 회복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우린 함께 감동하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 올라 기뻐하기도 했다. 가끔 가족 험담도 이모에게 했는데 그때마다 이모는 늘 전적인 내편보다는 가족의 입장에서 말하곤 했다. 그럼 난 혼자 이모에게 토라져 매일 하던 전화를 2~3일씩 건너뛰기도 했다.




그날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네 교회에 '히즈윌'이란 복음찬양팀이 오는데 꼭 한 번 와서 들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문자였다. 가끔 엄마 편만 드는 이모에게 토라져 전화를 하지 않는 날에는 출근길 히즈윌 찬양을 틀어놓고 운전을 했었다. 갑작스럽게 온 연락에 마음이 급해졌다. 꼭 정해놓은 운명처럼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들 저녁을 대충 차려주고 00 교회로 향한다. 히즈윌 멤버 중 한 분은 청주 '다락방의 불빛'에서 재즈 공연을 할 때 본 적이 있다. 내가 아는 피아니스트와 친분이 있어 공연이 끝난 후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해서 더욱 정감이 갔다.


'그저 당연하게 그저 익숙하게 그냥 그렇게 살아왔을까 주님 내게 주신 사람들 또 내게 주신 시간들 그저 사랑만 해도 너무 부족한데 익숙하고 무뎌져서 소중함을 잃지 않고 그저 사랑만 하며 후회 없이 사랑만 하며 살기 원해...'  히즈윌 <그저 사랑만 하며 살기 원해> 중에서


'영원할 것 같았던 일상들을 하나 둘 잃어가고 그제야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죠...'


첫 소절부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손수건을 준비해 가지 않아 양손을 번갈아 가며 눈에서 볼로 턱으로 흐르는 눈물을 꾹꾹 훔쳐 닦는다.

그 눈물은 두 번째 곡을 지나 세 번째 곡을 넘어 김동욱이 '광야를 지나며'를 부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도대체 주체할 수 없는 이 슬픔은 어디서부터 오는 건지.... 멍하니 이런 생각이 든 순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공연 중이라 처음 몇 번은 전화를 메시지로 돌렸는데 느낌이 싸하다. 뭔가 잘못됐다는 불길한 느낌.


허둥지둥 공연장을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리지 않는다.

몇 번을 반복해도 신호가 가다 끊길 뿐. 집에 있는 딸에게 카카오톡 보이스톡을 하니 받는다.


"엄마 독일 이모할머니가 위독하시데"


수 년째 심장 질환을 앓고 계시던 이모는 일주일 중 아픈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평소에도 이모 목소리가 좋지 않으면 "많이 아파? 아프지 마" 이렇게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오늘은 느낌이 좋지 않다.

이모를 다신 보지 못할 것만 같아서 운전을 하며

"안 돼 안 돼! 안돼!!"를 몇 번이고 소리 내 외쳤다.


"하나님 지금은 아니잖아요. 안되잖아요. 그 누구보다 하나님 사랑하시는 거 알잖아요. 이모 한평생 고생만 하고 선하게 살아오신 거 아시잖아요. 건 아니잖아요."


 차선을 미친 듯이 가로질러 집 어귀에 다 달았을 때쯤 길가에 나와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초조하고 다급하고 걱정 어린 얼굴로.

복부 대동맥이 파열돼 응급실로 실려왔던 이모는 중환자실로 옮겨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중환자실이라고 쓰여있는 빨간 글씨가 새겨진 그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심장이 쿵 멎는 거만 같았다.


이모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 목소리.

하이톤의 밝고 경쾌했던 그 목소리로

가영아 하로~!!! 하고 불러주면 안 돼?


마지막 임종 전 이모 얼굴을 보러 들어갔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은 얼굴에 처음에는 이모를 못 알아볼 뻔했다.

내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난 바보처럼 사랑해라 말만 반복했다.

"이모 사랑해. 이모 가영이가 너무 많이 사랑해. 우리 애들도 이모 보고 싶데.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 순간 이모가 온 힘을 다해 눈을 끔뻑한다. 이모가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게 분명해.


천국에서는 부디 아프지 않기를......


2023년 마흔넷. 4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서일까? 이런 거 믿으면 안 되는데...

올해는 유독 사건사고가 많아 평생 잊지 못할 한 해가 될 것 같다.

17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의 퇴사와 동시에 벌어진 아빠의 사고, 신랑의 입원,

그간 묵묵히 가족을 위해 희생한 엄마의 힘듦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

그리고 지금 이모와 생이별, 곧 내게 펼쳐질 새로운 일상까지.


매일 테두리 안에서 수많은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취재기자가 힘이 들어 그 세계를 떠나왔더니

세상 밖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몰랐던 일들이 도처에 깔려있었다.

그럴 때마다 늘 그 자리에서 날 바라봐주시는 한 분.

힘이 들면 기도하고 사무치게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힘이 들면 잠시 멈춰 서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고 말해주시는 그분이 있어서

세상은 여전히 살아갈만하다.


그리고 갑자기 슬픔이 찾아오면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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