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진 삶
간절하지 않다. 미국에 첫 발을 디디며 입국심사부터 당황하던 때, 시카고를 걸어서 다니며 편의점에서 맥주를 취급하지 않아 실망했던 때 그리고 Amtrak을 타고 3박 4일, 미국의 북부를 가로질러 서부로 가던 때의 낯섦과 외로움 등은 내게 간절함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서부를 A, B와 여행하는 이 시간은 간절함 대신 안정감이 자리를 차지했다. 내 삶은, 내 여행은 무엇으로 자양분을 얻는 것일까?
화장실이 있는 A의 집에 돌아왔다. 나이가 들으니,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는 화장실이 되었다. 여고 동창생들이니, 어느새 환갑이다. 누구는 신장이식을 받았고, 누구는 허리가 안 좋고 등등 그나마 친한 친구 중 아직 먼저 이 승을 떠난 친구는 없지만, 이런저런 병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으며, 이 중 공통으로 애를 먹는 장기가 있다면 단연 방광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A, B, C 모두 여행의 숙소 조건으로 화장실이 가까워야 한다는 만장일치 의견을 보였다.
A는 20년의 이민 생활 중 2/3를 혼자 세 아이를 키우며, 미국 적응과 아이들 교육 그리고 돈벌이 등을 하느라 몸이 많이 지쳐있었다. 당뇨를 기저질환으로 방광염도 A를 힘들게 한몫한다. 그런 A가 10월로 예정된 치료를 앞두고, 여행을 준비한 것이다. A는 여행 내내 약을 먹어도, 빈뇨와 잔뇨로 고생을 했다. 특히 야영을 할 때는 깜깜한 밤에 저만치 있는 공동 화장실을 찾아 렌턴을 들고 몇 번이나 나서야 했다. 그러면서도 A는 계획한 대로 여행을 진행했고, 하나씩 그 성취를 이룰 때마다 아이처럼 기뻐했다. 물론 B와 C는 이렇게 멋진 여행을, 이렇게 편하게 다녀도 되나 할 정도로 이 시간들을 만끽하고 있다.
어제 늦은 시간 LA 집에 도착했고, A는 오늘 일찍 일어나 간단한 업무처리를 위해 사무실에 갔다. A의 남편은 한국에서는 공공기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기러기 아빠 노릇을 했고, 7년 전 미국으로 와서 현재는 컨테이너를 옮기는 대형 화물자 기사를 하고 있다. 그는 늘 새벽예배를 보러 일찍 그리고 조용히 나가서 아침엔 볼 수 없다.
B는 워낙 부지런해서 A와 함께 일어나 A의 집안을 돌보고 있고, C는 자기 집에서는 6시 반이면 눈이 떠지는 습관이 밖에 나오면 이 때다 하며 늦잠을 자는 버릇으로 이어져 천천히 일어났다. B와 C는 주인들이 나간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건조된 빨래를 정리하고 정원 탁자에 앉아 B는 사도신경 필사를 하고, C는 노트북을 마주하고 있다. ‘예순 살 루미씨 노트북’
그러고 보니 딸들에게 받은 게 참 많다. C는 자기애가 강해 일반적인 그 나이 여성들과 비교하면 매우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느 날 C는 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엄마는 하고 싶은 거, 꽤 많이 하고 살았어. 물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했지만. 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죽음 또는 지금과 다른 시간들) 그리 슬퍼하지 않아도 돼. 적어도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 하며 우는 일은 없도록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말이야.” “그런 것 같네. 알았어. 엄마”
그러면서 C는 부모님을 생각한다. 양쪽 부모님들이 모두 돌아가시자, C의 느낌은 한 마디로 이거였다. ‘참 한갓지다.’ 내용인 즉 홀가분하다는 충청도 말이다. 그리곤 스스로 화들짝 놀란다. 우리 딸들도 이렇게 느끼겠군. 내로남불이라고 좀 슬플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순 살이 되어 한 달을 싸돌아 다니다 보니, 이제 쭈뼛거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 늙고 병든 부모님들이 돌아가셔서 내 삶은 한갓져졌고, 우리 딸들의 세상살이도 한갓졌으면 좋겠다. 그게 C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