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2018년 하반기에 작성된 글로 이미 지나간 시점의 논제를 다루고 있으며, 글쓴이의 현재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건설적인 논의와 비판을 환영합니다.
얼마 전 데뷔한 신인 걸그룹 아이즈원(IZ*ONE)의 데뷔 앨범 초동 기록이 8만 장을 넘겼다고 한다. 이는 걸그룹 데뷔 앨범으로는 사상 최대의 수치이며, 소녀시대의 10주년 앨범 초동이 약 9만 장인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기세가 아닐 수 없다. 보이그룹으로 가면 더 놀라운 수치를 경험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의 최신 앨범은 초동 193만 장을 기록하며 이전의 기록을 경신했다. 21세기에 음악을 CD로 구입해서 듣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음원 다운로드 사이트가 일반화된 요즘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CD는 음반 시장의 기형적인 구조에 기생한다
CD는 음원 파일과는 다르게 그 자체로 실물상품이다. 즉 소장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과연 CD의 그러한 소장 가치가 초동 193만 장을 가능하게 했을까? 현재 방탄소년단 공식 팬카페 회원 수는 약 110만 명이라고 한다. 아이돌 그룹의 음반은 단순히 음원을 저장한 CD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굿즈의 일종이다.
물론 개인 소장용으로라도 어느 정도 갖춰진 음반을 발매하는 데 드는 비용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때문에 최근 많은 가수들이 디지털 싱글 발매로 음반 차트 대신 음원 차트 진입을 노리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음원 출시 기념 포토북’을 파는 것보다는 CD를 포함한 앨범을 파는 것이 가수로서 의미도 있어 보이고, 종종 이 실물 음반에는 음원 판매 사이트에서는 다운로드할 수 없는 CD only 음원이 수록되기도 한다. 어쨌든 적어도 아이돌 그룹은 CD를 대체할 ‘유형의’. ‘소장 가치가 있는’ 것이 새로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CD가 포함된 음반을 낼 것이다. 예외적으로 빅뱅의 GD가 USB 형태로 음원을 판매한 적이 있는데, 역시나 컴퓨터와 같은 복합재생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CD보다 불편한 부분이 존재한다. (심지어 USB 내에는 음원 파일이 아닌, 음원의 다운로드 링크만 포함되어있었다.) 게다가 이 방법 역시 여전히 파일 형태로 음악을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MP3 플레이어와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CDP 이용자들이 CD를 듣는 데는 CD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미세한 홈이 레이저로 읽히며 음악이 재생되는 것에서 오는 레트로 감성을 즐기는 이유도 있을 테니, 그들의 니즈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22년 현재 레트로 감성을 즐기는 이들의 타깃은 CD가 아닌 LP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누가 요즘 CD로 음악을 들어?
사실 CD는 과거 LP판을 전축으로 재생해서 음악을 듣던 시절에서 약간의 기술 진보를 이룬 것으로, 그 기능이란 음악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 CD에 반짝이는 뒷면을 보면 0과 1의 디지털 정보를 담은 아주 미세한 홈들이 마치 일주하는 별처럼 호를 그리며 촘촘히 배열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CD 플레이어는 이 미세한 홈에 레이저를 쏘아 거기서 굴절되는 정보에 따라 디지털 신호를 읽어 내고, 그것을 음파의 형태로 재생하는 역할을 한다. 플레이어에 CD를 넣으면, CD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위잉-하고 작은 모터 소리를 내고, 음악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 CD 플레이어를 열어 보면 레일을 따라 CD의 중앙과 바깥쪽을 이동할 수 있는 레이저 장치가 보인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CD 플레이어는 소니의 CD 워크맨 D-NF340 모델로, 2006년 출시되어 현재는 단종된 모델이다. 최초의 MP3 플레이어가 1998년 출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CD player가 꽤 오래 쓰인 셈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이제훈에게 이어폰을 건네며 명대사 ‘들을래?’를 남긴 극 중 시점이 바로 이 MP3 플레이어가 최초로 출시된 시점과 비슷하다.) 이 시절에는 주로 카세트테이프와 CD를 통해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CD 플레이어의 역할이란 말 그대로 CD를 재생하여 음악을 듣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2007년도 즈음에는 휴대용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2010년대에 들어서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별도의 휴대용 음악 재생 장치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마저 자리를 잃은 마당에 과연 CD 플레이어는 무엇으로 승부를 볼 수 있을까? CD 자체의 부피 때문에 플레이어의 크기를 줄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휴대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많아야 20곡 정도가 들어가는 터무니없는 저장 용량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CD-R의 경우는 한 번 기록하면 내용을 수정할 수 없다. CD를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CD 플레이어를 사용할 일이 있을까?
통일되기 전까지 CD 플레이어는 안 망해 (우스갯소리)
CD-R의 기록 매체로서의 한계가 장점으로 발휘되는 의외의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군대다. 초록창에 ‘CD 플레이어 후기’를 검색하면 군인 필수품이라는 CD 플레이어가 추천 상품에 뜬다. 솔직히 좀 놀랐다. 군대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저장 매체로 사용할 수 있는 MP3 플레이어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군인들이 ‘싸제 음악’을 들으려면 누군가가 구워 준 CD와 CD 플레이어가 필요한 것이다. 이들에게 CD 플레이어는 사회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말년 병장 생활의 따분함을 조금이라도 날려 줄 수 있는 사소한 해방의 수단이 된다.
*하지만 요즘(2022~)에는 군대에서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일과 중 배정되어있어서 아마 CDP는 더 이상 추천 품목이 아닐지도...
▲ 영화 <건축학개론(2012)>
CD 플레이어의 필요성은 곧 CD의 필요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내용을 뒤집어 보면, CD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CD 플레이어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분명히 CD는 최신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에 한참 미달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방탄소년단 초동 기록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최신 기술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지만, 과연 모든 사람이 이러한 새로움을 추구할까? 우리는 더 이상의 첨단 기술 없이도 충분히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시공간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전문적인 영역으로 가면 나노(10-9) 이하의 단위까지 계측하며 약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운하까지 탐구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으니 사실상 여기서 더 발전한다고 해도 일반인이 체감하기는 어려운 정도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최전선에서 앎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옛 것에서 향수를 느끼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그것을 일종의 '멋'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전환은 옛 것과 그것의 불편함에 가치를 부여한다. 어떤 대상의 기술적인 열등함이 그 대상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오히려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열등함이 주는 역설적 가치
음악 파일의 저장 매체로서 CD가 가지는 열등함을 다시 찬찬히 뜯어보자. 거의 모든 CD 음반이 CD-R로 기록되어 판매된다. CD-R에 기록된 음악은 변하지 않는다. 즉 CD를 임의로 훼손하지 않는 이상 CD 안에 담긴 음악은 불변하고, 불변하는 대상은 소장 가치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CD라는 유형의 존재가 주는 소장 가치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MP3 플레이어나 스마트폰에 담긴 음악 파일은 그것을 담고 있는 대상이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러나 CD는 그 자체로 누군가의 음악이다. 음악이라는 순간 예술, 무형의 대상을 유형화하여 간직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CD라는, 훼손되기 쉽고 보호해야 하며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사물이 그 불편함으로 인해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단순히 옛 것에서 오는 레트로 감성을 즐기는 것 외에도, 분명 CD가 아직도 이렇게나 잘 팔리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소장 가치가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필자는 바로 이 소장 가치에 큰 매력을 느껴 2007년부터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구입해 왔다. 초기에는 주로 스피커가 달린 카세트 오디오를 이용해서 CD를 틀어 두었는데, 오래 쓰다 보니 카세트가 망가져 버려서 작년부터는 아빠가 쓰시던 휴대용 CD 플레이어(워크맨)를 받아 가끔 이용한다.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어 보니, CD 플레이어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에 비해 실질적인 장점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적게는 일 년에 한두 장, 많게는 몇십 장까지 내가 약 10년 동안 모아둔 컬렉션 중 가을 분위기에 맞는 버스커버스커 3집 앨범을 CD 워크맨에서 재생해 보고,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동일한 음원을 재생시켜 보면서 CD 플레이어가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지 간단하게 분석해보았다.
▲ 버스커버스커 3집 앨범과 SONY CD 워크맨, SONY 헤드폰.
SONY CD WALKMAN D-NF240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본 게 전부라는 친구의 말에 왠지 모르게 옛날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필자. 사실 필자도 워크맨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지가 1년이 넘었다. 여전히 소장용 음반을 구입하고는 있지만, 특별히 듣고 싶은 날이 아니면 굳이 CD를 꺼내어 듣지 않기 때문이다. CD 플레이어를 분석하기 위해 근 1년 만에 추억 속의 워크맨을 소환했다. 유선 이어폰을 잃어버려서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연명해오던 터라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기 위해 룸메이트에게 헤드폰도 빌렸다. CD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길게 누르자, 가로 2cm, 세로 1cm 정도의 작은 액정에 워크맨 로고가 뜨며 삐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악이 재생되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원을 재생했을 때와는 다르게 음절마다 고막을 두드리는 듯한 뾰족한 소리가 아니라 마치 영화관에 온 듯이 온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소리다.
▲SONY CD WALKMAN D-NF240
근데 소리가 너무 커!
고막이 견딜 수 있는 최대의 데시벨을 시험하듯이 귓가에 미친 듯이 몰아닥치는 음파에 헤드폰을 벗었는데, 벗어던진 헤드폰에서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찔했다. 기계 비평 좀 해 보려다 청각을 잃을 수는 없는데. 볼륨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액정에 표시되는 내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3번 트랙까지 들었을 무렵에, 헤드폰 잭을 빼 보니 여전히 재생 시간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그제야 볼륨 버튼이 작동했다. 즉, 헤드폰 잭이 빠진 상태에서만 음량을 조절할 수가 있었다. 음량을 줄이고 나서 다시 헤드폰을 꽂아 보니 소리가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력 손실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CD 플레이어를 사용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 D-NF340의 매뉴얼 중 헤드폰 잭에 연결하는 리모컨에 대한 설명.
▲ 볼륨 버튼의 동작 방법을 찾아냈을 때의 희열감이란
구글신의 힘을 빌려 매뉴얼을 찾아보니 이 모델은 헤드폰 잭에 리모컨을 연결한 뒤 그 리모컨을 장치에 꽂아야 하는 아주 번거로운 제품이었다. (어쩐지 헤드폰 잭 옆에 "REMOTE"가 쓰여 있더라니.) 시험 삼아 음량 버튼이 있는 이어폰을 친구에게 빌려 꽂아 보았지만 음량 버튼은 역시나 작동하지 않았다. 2006년에 나온 제품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일일이 헤드폰 잭을 꽂았다 뺐다 하며 음량을 조절하고 확인해야 한다니 이런 부분까지 멋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주저했다. (심지어 헤드폰을 꽂을 때마다 삐빅! 하는 연결음이 나서 음악 감상에 방해가 된다.) 어쨌든 과학도 답게 트러블슈팅에 성공하여 뿌듯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음악을 재생했다. 그런데 2시간 정도 재생하자워크맨이 완전히 작동을 멈춰 버렸다. 아마 건전지가 다 된 것 같았다. 배터리가 없어도 DC 전원 어댑터를 연결해서 사용이 가능하지만 집에서 어댑터를 미처 가져오지 않은 터라 아쉽게 CD 플레이어 체험은 여기서 종료되었다.
소장품인 CD를 음악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CD 플레이어는 꽤 매력적인 기계이다. CDP라는 것은, 적어도 스마트폰이 나온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음악을 재생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소유할 수 없는 무형의 대상을 유형화하여 소유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소장가치가 CD를 구입하게 하고, 이 소장가치에서 CD 플레이어의 필요성이 파생된다. 기억, 감정과 같이 가질 수 없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CD에 대한 수요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K팝 아이돌의 음반 판매량에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똑같은 트랙리스트의 CD를 2~3가지 다른 콘셉트의 화보를 찍어 앨범을 여러 버전으로 발매하고, 또 구매력이 있는 팬들은 대부분 서로 다른 버전을 세트로 모두 구입하기 때문이죠.
이 당시에는 앨범이 잘 팔리는 이유를 CD의 소장가치에서 찾아 CDP에 대한 기계 비평으로 연결 지었으나, 지금은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네요. 이제 정말 아이돌 팬들도 CDP로 음원을 듣지 않기 때문이죠. 한편으로는 상당히 아쉽기도 합니다. 고음질의 음원이 담긴 CD를 놔두고 MP3로, FLAC 등의 고음질 음원을 별도로 구입하여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현실이요. CD 음원을 재생해 본 분이라면 제게 공감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즈음 '레트로 감성'을 위해 LP와 턴테이블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 같은데, CD에 담긴 음악을 듣기 위해 구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불과 몇 년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도 빠르게 바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