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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커피 Jun 21. 2022

무엇이 문제일까요? - 두발 자유화에 대한 단상

왜 교복 치마가 짧으면 안 될까 |  억압받지 않는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

*본고는 2018년 하반기에 작성된 글로 이미 지나간 시점의 논제를 다루고 있으며, 글쓴이의 현재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건설적인 논의와 비판을 환영합니다.





중고생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두발 자유화가 내년 하반기부터 현실로 다가온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발표한 ‘서울학생 두발 자유화를 향한 선언’에 두발규제의 전면 폐지가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두발규제 철폐 소식을 접한 내 심정은 이러했다.


이 사회가 이제야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머리 길이가 어깨선을 넘으면 절대 머리를 풀고 다닐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머리카락을 중앙에서 단정히 묶어야 한다’는 별 의미 없는 세부 규정까지 철저히 지키는 전교 1등 모범생이었다. 다들 한 단 씩 교복 치마를 줄여오는 마당에, 나는 교복을 맞출 때부터 일부러 무릎을 덮는 길이의 치마를 찾던 고루한 학생이었다. 이렇게 ‘단정하고 학생다운’ 나에게 평소 만나 뵐 일이 잘 없는 학생부장 선생님께서 말을 걸어 오셨다.


-이런 말 하는 게 좀 미안한데, 우리 학교 여학생 두발 규정이 머리카락을 묶었을 때 허리를 넘지 않도록 되어 있거든. 지금 네 머리 길이가 너무 길어서 잘라야 할 것 같다.

-아,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잘라 올게요.


중학생 때의 나는 스스로를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가끔 지각을 하는 것 빼곤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복장과 두발에 대한 부분은 내가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이 얼굴이 조금이라도 희끗해 보이는 여학생에게 화장을 했냐고 물어보고, 컬러렌즈를 착용한 학생에게 ‘지금 렌즈 낀 것 맞지?’하고 물을 때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저 ‘그러니까 왜 규정을 어겨?’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규제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학부모들에게 조희연 교육감의 발표는 말 그대로 ‘폭탄선언’이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이고, 우리 애 머리색이 총천연색이 되는 걸 어떻게 보고 있으라는 말이에요!’


두발규제 폐지를 반대하는 ‘어른’들의 논리는 아주 간단한 한마디로 귀결된다. ‘학생은 학생다워야지.’ 헤어스타일에 신경 쓰다 보면 학업에 소홀해지지는 않을지, 잦은 펌과 염색으로 모발 건강이 상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자녀를 사랑하는 학부모들이라면 분명 한 번쯤 하게 될 걱정으로, 전혀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수능 끝난 고3 교실의 그 화려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학생들도 분명 앞에서 말한 걱정 많으신 평범한 부모님들의 자녀일 텐데 말이다. 정말로 자녀의 학업과 건강이 걱정된다면 염색과 펌은 입시의 종결 여부와 관계없이 지양되어야 함이 마땅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처럼 ‘학생을 위해서’라는 논리의 허점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지만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는 왜인지 정설(?)로 통한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 동생은 학군 내에서 좋은 면학 분위기와 입시 결과로 꽤 알려진, 전통 있는 A여고를 나왔다. 이 학교 학생들의 차림새는 2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이 매우 ‘학생답고 단정한’ 용모를 갖추고 있다. 8월의 폭염 속에서도 무릎을 완전히 덮는 애매한 기장의 하복 치마는 통풍과는 거리가 멀다. 양말조차 학교 마크가 그려진 교복의 일부이며, 구두의 규정도 따로 존재한다. 전방 100미터 앞에서도 이 A여고 학생들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몸에 딱 붙어 불편해 보이는 짧은 셔츠와 긴 치마에 보는 내가 답답할 지경이다.


일상에서 최소한의 자기표현조차 자제하는 것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요건이라도 되는 것일까? 나의 모범생 생활을 되돌아본다.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규정에 맞는 복장과 두발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이 ‘학생다운’ 나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학생다움’이라는 명목으로 무기력함을 강요받아 왔고 모범생인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무기력한 학생이었다. ‘왜 화장 못 하게 하는지 모르겠어, 왜 치마 짧으면 안 돼?’라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나는 그저 규정을 지키지 않는 아이들의 반항심 내지는 투덜거림으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바보는 나였다. 근거를 알 수 없는 규정에 종속된 알량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혼자 도취되어 있던 것 뿐, 규정이 옳은지 아닌지는 안중에도 없이 혼자 고고한 척 살아왔던 것이었다.


두발규제는 경직된 사회구조의 잔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입시가 정말 중요하고 머리 모양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입시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라면, 그러한 수단을 선택할 자유는 개인에게 있다. 두발규제 철폐가 아직도 사회적인 논란이 되어야 하는 문제로 여겨진다니. 학생들은 입시에서 최고의 결과를 낼 것을 부모와 사회로부터 강요받는다. 그 연장선이 두발규제와 같은 개인의 권리 억압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생산성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내던지는 노예근성에 물들어 있을 텐가. 그렇게 바라 마지않는 생산성이 정말로 우리를 위한 것일까? 두발규제를 입시제도와 학생의 문제로 보는 것은 다소 근시안적인 사고이다. 집단의 생산성과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문제는 사회 곳곳에 산재하여 있다. 인간을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자본주의적 사회 풍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두발규제가 폐지된다고 해도 비슷한 문제들은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바보 같은 착각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생산성을 높여야만 하는 도구가 아니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삶이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인간다운 삶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이토록 당연한 개인의 권리가 사회적 편견 속에서 침해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분위기 조성’이라는 말에 가려진 생산성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회는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 즉 일(Work)과 개인적 삶(Life)의 균형(Balance)이 있는 삶이란 이런 사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이러한 신조어가 생긴 것 자체가 직장에서는 인간성을 존중받을 수 없다는 방증일진대, ‘워라밸’의 추구는 여전히 모순을 갖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버리는 사회에서 ‘워라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직장에서는 *사축(社畜)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퇴근하면 멋진 나만의 삶을 사는 것이 썩 인간다운 삶은 아니지 않은가.


*회사의 가축처럼 일하는 직장인이라는 뜻의 신조어로, 직장인들의 현실을 자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됨. | 출처: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우리는 어떤 집단에 속해있든지 간에 인간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다른 어떤 이유도 인간답게 살 권리에 우선하지 않는 사회가 정말 건강한 사회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로의 전환은 개개인이 학습된 무기력함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쓰니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적어도 짝꿍이 교복 바지통을 줄였다고, 색이 있는 립밤을 발랐다고 선생님께 지적당할 때 옆에서 고소하게 생각하는 속 좁은 모범생에서는 벗어나야 될 일이 아닌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필요한 권리 침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장환경 속에서 모르는 사이 이미 편견에 물들어버렸지만, 적어도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나와 다른 남을 보았을 때 순간 이질감이 들더라도, 그것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정도의 판단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떠한 사실을 인식하고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치우친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러한 억압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자신과 타인이 받는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순응하거나, 심지어는 그 억압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면 당신의 인간다움은 앞으로도 계속 동일한 논리로 침해당할 것이다.


학창시절 숱하게 들어 왔을 말을 하나 떠올려 보자.

‘학생들은 화장 안 하는 게 당연하지. 학생다운 게 제일 예쁜 거야.’


타인을 관찰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갖가지 편견에 점철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생각이 타인을 억압하는 논리가 되는 순간 그것은 문제가 된다. 학생들이 화장을 하지 않는 게 자신의 눈에 더 흡족하다고 해서, 그것이 학생들이 화장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주관적인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집단으로부터 강요받은 행동을 비판적 사고 없이 그대로 긍정해버리는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 우리는 결코 인간다울 수 없을 것이다.


쟁점이 아닌 것을 쟁점화 해온 역사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학부 재학 시절(3학년) 글쓰기 수업에서 작성했던 칼럼입니다.


<비판적 사고와 글쓰기>라는 제목의 강의였는데, 공대생이었기에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력과 공대생의 시점을 흥미롭게 여기시는 태도가 좋았고, 다른 학우들이 쓴 글들을 보며 생각을 나누고 교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평가를 받기 위해 쓰고 제출했던 과제였지만, 열과 성을 다해 쓴 글들이었습니다. 제가 썼던 글들이 나름대로 꽤나 마음에 들어서, 조금 다듬어서 브런치에 하나씩 꺼내보려 합니다.


이 또한 제가 이루었던 것들 중 하나이기에 세상에 내놓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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