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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Jun 19. 2021

1.일요일 과자를 사먹은 것도 죄였다.

나는 1977년 5월 극단적인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극단적 보수적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지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주일날은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날이기 때문 세속적인 것을 멀리 해야 한다.


*주일(主日) 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일요일을 주일(主日) 로 부른다. 주일날의 주(主)는 예수님이나 하나님 같은 신을 명칭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들이 그 날을 부여한 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TV도 라디오를 시청하지 않는다. .

-상거래를 하지 않는다. (돈을 주고 거래를 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나 학원을 가지 않아야 한다. 

-회사에 나가거나 혹은 출장도 가지 않는다.

-주일날 있는 각종 시험에 응해서는 안된다. 

-주일날은 반드시 소속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멀리 여행이나 명절을 세러 가지 안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신을 자연스럽게 믿게 되고 경외하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는 사이비 같은 광신도 집단은 아니었지만 기독교계에서는 아주 보수적으로 유명한 교회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온갖 핍박을 견디면서 신앙을 지켜왔고 한국 전쟁 당시 공산군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어 왔을 정도로 어떤 상황에도 신앙과 타협하지 않는 교회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인가 3학년인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일날 이모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주일날 오전 어린이 예배가 끝나고 집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나를 본 이모는 어린 조카에게 먹을 것을 사주려고 집 앞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어려서부터 주일날 먹을 것을 사 먹는 것은 죄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과자를 잘 먹을 수 없었던 나는 이모의 호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자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나는 어린 조카에게 선의를 베풀려고 하는 이모의 행동이 뱀의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부정적 의심을 감히 할 수 없었고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선 뜻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의지대로 사 먹는 것이 아니라 이모가 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로써는 죄의 정의에 대해서 판단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상황 판단에 있어서 혼란이 있었다.  


198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지금의 시대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이 살았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었지만 당시에도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상대적으로 더 가난했다. 초등학교 1~3학년 때까지는 가난의 의미와 가난으로 인한 수치심에 대해서 무감각했지만  머리가 커진 초등학교 4학년쯤이 돼서야 가난이 뭔지 알았고 가난이 타인한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한 기준은 간단했다.  

-4인 가족이 4~5평의 단 칸 방에 살고, 

-점심 도시락에는 언제나 김치나 멸치뿐이었고 

-집에 여전히 흑백 텔레비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모와 함께 슈퍼 마켓으로 들어선 나는 선반에 진열된 다양한 칼라로 눈부시게 빛나는 과자 포장지 봉지들을 보면서 마치 찰리의 초콜릿 공장에 온 것처럼 흥분되었고 내 마음대로 과자들을 고를 수 있다는 선택의 자유에 벅차 있었다. 


그러나 항상 인생은 단 맛 뒤에 뒤 쓴 맛이 오게 마련이다.  이모가 사준 과자를 마당에서 먹고 있었는데 주일 예배가 끝나고 돌아온 아빠는 천진난만하게 과자를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내가 중죄를 진 것처럼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마당의 수돗가에 데리고 가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빨래 방망이를 집어 들더니 어린 아이의 가냘픈 종아리를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이라면 빨래방망이의 생김새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빨래방망이로 맞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도 짐작이 갈 것이다. 세탁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어느 집에나 나무 빨래 방망이가 하나씩 있었다. 빨래들을 세차게 두드리면서 마찰력으로 때를 빼어야 했기 때문에 빨래 방망이들의 표면은 거칠 거칠해 지고 빨래의 물기를 흡수하면서 강하게 단련이 되어 가공할 만한 흉기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울며 불며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고의로 죄를 지었다는 분노심에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잘못을 알면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을 수 없었으며 죄의 심판자가 되어 버린 아버지는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려고 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이 하와에게 느꼈었던 분노(기독교인들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하지만)를 아버지 자신도 느끼려고 노력했고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거 같다.


 나는 올해로 40 대 중반이 되었지만 그 날 마당에서 나를 마구 때렸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안는다. 이상하게도 나는 아버지에게 맞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모습을 제삼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기억이 난다. 


 이모는 조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선의를 베풀었던 것 뿐이었는데 내가 맞는 모습을 본 이모는 어린 조카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이모에게 뭐라고 혹독한 말은 못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죄 없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세상의 죄를 가르쳤다고 생각하며 이모를 미워하고 원망스러워했을까?


 그 날 아버지의 무서운 모습을 본 이후로 아버지는 더 이상 나에게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징계가 무서워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하나님은 자상한 분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어린 아이에게 까지 고통스럽게 벌을 내리는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기 위해 이후로 나를 죄의 길로 유혹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나쁜 악마 급하며 죄로 물든 세상에서 나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지키기 위해 나와 세상을 구별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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