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결혼 전에 기독교 신자였고 같은 교회에 다니던 목사님의 소개로 결혼을 하고 대전 삼성동에 있는 교회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대전의 삼성동은 대전에서도 아주 작은 동네였고 지금도 여전히 작은 동네에 속하며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간이 멈춰 버린 동네다.
기독교인들이 교회 근처에 가까이 사는 것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한 방지책이다.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이른 아침의 새벽 예배와 수요일 저녁 예배, 금요일 저녁 예배, 주일 예배를 참석해야 하는데 교회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면 교회에서 진행하는 예배에 참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배를 참석하는 횟수가 적어지면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로부터 신앙이
나약해지고 세상의 죄에 빠져 있다는 훈계나 책망을 듣게 된다.
세상에 빠져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말이다. 죄에 빠져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모든 예배에 참석을 해야 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하나님께 시간을 드린다는 헌신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개인적 편의나 직업을 포기하는 것을 아름다운 고행이라고 미화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핍박을 견디며 주일 아침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 눈이 수복이 쌓인 산 길을 뚫고 동상에 걸리면서까지 교회까지 걸어온 어린이, 나중에 커서는 성공한 검사가 되었고,
일요일 회사에서 출장이 잡혀 있었는데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둔 사람은 나중에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간증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를 사수하라는 도전과 하나님께서 다 보상을 해주신다는 격려의 메시지가 되기도 했다.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자녀도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으로 훈련시켜 자녀들도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배는 반드시 참석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아침 일찍 시작하는 새벽 예배에도 참석을 해야만 했고 어린 나로써는 새벽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6시 전에 눈을 뜨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매일 아침 어른 새벽 예배를 다녀와서 나와 동생을 깨워 어린이 새벽 예배에 보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죄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잠을 더 자고 싶어서 새벽 예배를 가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아버지의 숨겨져 있었던 엄한 모습이 나타나 나와 동생은 마지못해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고 잠을 쫓으며 새벽 예배로 향했다. 그 시간 이른 아침 교회로 향하는 나와 동생을 본 동네의 어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어린이라며 사정을 모른 채 나와 동생을 대견하게 생각했었다. 초등학교 때 까지는 아침 6시 어린이 새벽 예배에 참석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전까지는 새벽 5시에 시작하는 어른 새벽 예배를 참석해야만 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의 모든 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예배에 빠지는 것이 죄라고 들어 왔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예배에 빠지는 것이 큰 죄라는 인식이 박혀 버렸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예배를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외적인 방해 요소가 없었지만 군대에 입대하면서 가고 싶어도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벽 예배나 수요일, 금요일 예배는 참석할 수 없어도 일요일 예배만큼은 반드시 참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아침마다 내무반에서는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사람을 모집했다. 부대에서는 대대장의 명령으로 자대에 갓 배치 받은 이등병들을 주의 깊게 케어하여 군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고참 눈치보지 않고 종교 행사에 참여하도록 장려를 했다.
내부만의 제일 고참인 병장은 일요일 아침 9시경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자 하는 지원자를 조사했다.
“오늘 아침 종교 행사 갈 사람 손들어, 대대장 명령이니까 가고 싶은 사람은 고참 눈치 보지 말고 손들어”
나와 몇 몇 동기들은 두리번 두리번 눈치를 보면서 손을 들었다.
“김 상병, 저기 손든 이등병들 오늘 종교 행사 가게 해, 눈치 주지 말고 보내고, 업무 분담 잘 해서 제 내들 없어도 오늘 오전에 정비 잘 하도록 해”
그러나 그 말속에는 무언의 협박도 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부대에 복귀할 때쯤이면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 대대 운동장과 내무반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군화들이 밖에서 말려져 있었고 담요들이 빨래 줄에 널려져 있었다.
눈치 없이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종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손을 든 나와 동기 몇 명은 종교 행사 참석 후 부대에 복귀 후 직속 상사인 일병의 호출을 받고 내무반 뒤쪽 창고로 불려 나갔다.
“이 자식들 눈치가 없네, 너 네들 오늘 아침 교회 갔을 동안에 다른 동기들이랑 너네 고참들이 부대 청소랑 내무반 정리 다했어, 너네만 종교 행사 가고 싶냐? 다른 고참들이나 동기들도 가고 싶은데 참는 거야. ”
눈치 없었던 우리를 향해 세차게 욕을 퍼붓고 얼굴과 가슴을 주먹으로 몇 대 가격한 뒤 다음 번에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며 고참은 자리를 떠났다. 어둡고 조용한 창고에서 몸집이 나보다 작고 마른 고참에게 가격을 당하는 순간, 이것이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될 핍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고민이 깊어졌다.
죄와 타협하느냐? 신앙을 지키느냐?
부흥회를 가면 유명한 목사님들은 군대에서 어렵게 신앙을 지킨 일화를 이야기를 해주면서 신앙의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도전을 심어주기도 했지만 나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대에 있던 시절 고참들로부터 군화로 차이고 총 개머리 판으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일요일 마다 빠지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피가 나고 얼굴이 퉁퉁 부었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나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당한 고난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폭력에 쉽게 굴복하는 사람이라 나중에 지옥에서 뜨거운 불에 들어가는 것 보다 지금 고참의 주먹이 무서워졌고 나중의 보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죄와 타협을 결심하게 되었고 한 번 두 번 일요일 교회 예배에 빠지다 보니 자연스레 나를 옥죄던 신앙의 죄책감은 퇴색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명히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안고 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부모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네가 죄와 친해져 갔지만 부모님이 너를 위해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전히 너에게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거야.”
시간이 지나고 병장이 되었을 무렵 이등병들이 새로 자대에 배치되었는데 그 중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이 녀석도 일요일 마다 고참들 눈치 안보고 기독교 행사에 참석했지만 나는 그 녀석을 응원하기 보다 아니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 녀석도 상병들이 협박을 했는지 언젠가부터 종교 행사에 참석을 하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피우지 않았던 담배까지 피우게 되었다.
너무 변해 버린 이 녀석을 보면서 담배도 하지 않고 술도 하지 않고 욕도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나마 조금은 깨끗하다는 자만심을 가지기도 했다.
군대에 입대해서 예배 참석을 놓고 고참들로부터 혼이 나던 시기까지 예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나는 절대 세상과 죄와 타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고참들의 폭력에 못 이겨 오랫동안 지켜오던 신념은 무너져 버렸다.
한 사람의 오랜 세월 동안 구축해온 신념은 폭력 앞에서 무너지기도 하며 혹은 돈이나 다른 유혹에 의해서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기쁘게 감수해왔던 믿음의 선배들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믿음의 선배들을 닮고 싶었지만 폭력 앞에 굴복한 나에게는 불가능했다.
대신 폭력 앞에서 무너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폭력 이외의 다른 형태의 시련과 고난으로부터는 신앙을 굳게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