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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Jul 28. 2019

1. 오랜 친구의 죽음을 들었을 때 갈까 말까 망설였다

고아 친구의 죽음 이후, 왜 회사에서 직원들의 주소와 연락처를 기록하는지 알게 되었다.


 5~6년 전 같은 교회에 다니던 또래의 동료가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고,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그런 사이도 아닌, 관계를 정의하기에 어색한 그런 사이였다. 일요 밀마다 교회에서 보면 가볍게 눈인사하는 정도였고, 교회 사람들과 같이 하는 모임에 가끔 오면 잘 지내세요? 안녕하세요?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둘이 한 공간에서 같이 있으면, 인사 이외에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에는 어색한 사이였고, 여럿이 같이 있을 때에는 아무런 어색함이 들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이름은 K 군이었다.

* K군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별로 바람스럽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게 그의 이니셜만 밝히기로 한다. 


 이 녀석은 태어난 이후로, 친 부모의 손에서 자라지 않은 가여운 녀석이었다. 어렸을 때 어떤 경로로 고아원에 맡겨진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보육원에서 생활을 시작하여, 고등학교 학창 시절까지 고아원에서 지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K 군의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나는 이 녀석과 사람을 알아가는데 필요한 대화를 시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녀석에게 직접 개인 사를 물어보거나 내 개인사를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녀석이 고아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보육원 생활은 사람들을 통해서 많이 들어온 터라,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지만, 이 녀석을 보면 항상 웃음을 띄고, 나한테도 가볍게 인사를 해주는 밝은 녀석이었다. 약간 자신감은 없어 보이고 숫기가 많은 녀석이었지만, 아주 맑고 깨끗한 녀석이었다.


 단지 맘에 안 드는 게 있다면 곱슬머리에, 마른 몸, 그리고 이 녀석을 볼 때마다 이 녀석이 보육원 출신이라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걸 알았기에, 이 녀석을 볼 때마다, 녀석에 대한 동정심이, 내 마음속에 스며오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 녀석의 생활이 바빴는지,  면 년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간 난 이 녀석의 존재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녀석이 오늘 죽었다고, 그의 지인으로부터  이 녀석의 "부고 내용과, 장례 식 날짜, 장례식 장소에 대해서 "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고아인 이 녀석의 가족이 없었을 텐데, 누가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인지 의아하긴 했었다.


  알고 보니, 이 녀석의 회사 사장이 보낸 것이었다. 실은 이 녀석은 교회를 나오지 않은 몇 년간 가산동에 있는 IT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고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고, 알바를 하면서 돈을 모아 대학에 다닌 모양이었다. 일류 대학은 아니지만, 서울의 한 대학에서 전자 공학과를 졸업하여, 국내 IT 기업에 들어가서 일을 했던 모양이다. 


 이 녀석은 자신의 고아로써의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을 알기에,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왔었고, 어떻게 든 돈을 많이 모으기 위해 무식하게 살아왔던 모양이었다. 점심도 간단하게 해결하거나, 주말이면, 교통비도 아까워서 멀리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가급적이면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는 이외에는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힘들게 잡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오래 살아 남기 위해 야근도 즐겁게 하고, 누가 어떤 일을 시켜도 불평불만 없이 즐겁게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아원에서와 같이 시간을 보냈던 고아원 친구들과는 달리, 억세지 않은 직장 동료들은 K군에게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이었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몇 백만 원만 손에 쥐어지고 독립을 해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누군가 후원자가 없는 이상, 혼자 몇 백만 원을 가지고 사회에 나와서 고시원에 살면서 일용직을 전전긍긍 하거나 혹은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면서 교도소를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이 많고, 특히 여자들은 보육원 졸업생의 90%가 유흥 업소로 간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일을 피하고, 적당이 일을 하는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는 미련한 사람, 야망을 쫓는 사람, 돈을 좇는 얼간이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K군은 자신의 상황에 적응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일만 하는 그런 우직하고 무식한 융통성 없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오늘 이 녀석이 죽었다니, 나는 처음에 이 녀석의 친척이나 아버지 혹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걸로 생각을 했다. 


 그러데 다시 한번 장문의 문자를 확인해 보니,  K 군의 장례식이 8/12일 가산동 서울 장례식장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과연 누가 장례식에 찾아갈 것인가? 나도 가야 되나?  하고 망설여졌다. 


 오늘 와이프가 회식을 하고, 아이들도 내가 돌봐야 하는데, 그리고 가산동까지 가려면 차도 많이 밀릴 덴데, 이 녀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애도하기보다는 "장례 식장에 가야 되냐 말아야 되냐"를, 계속 고민하는 얼간이 노릇을 했다. 


역시 나는 얼간이 중에 못난 얼간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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