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네버랜드 후기
-들어가기 전에. 모든 작품은 저마다의 고귀함을 갖추고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어떤 작품을 보고 “뭐야 이 십덕은”이라는 반응에 그친다면 딱 그만큼만 보이는 것이다. 색안경 없이 작품을 들여다본다면 그 안의 서사와 비롯된 철학을 선물 받을 수 있다. 그동안 봐온 애니,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강철의 연금술사’가 그렇고, 진입장벽이 있었던 ‘약속의 네버랜드’도 그랬다.
-스포주의. 엄마라고 불리는 고아원의 관리자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일정 시기가 되면 ‘낙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떠난다. 하나 모든 세계사적 혁명의 시작이 그렇듯, 이 곳의 몇몇 아이들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은 잔혹한 현실이자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로 이끈다. 사실 그 고아원은 식용아들을 키우기 위한 농원이었고, 아이들은 괴물들의 식량이다. 마치, 닭장과 같은 것이다.
결국 모두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 주인공 엠마와 일행은 탈출에 성공한다. 여기까지 시즌1의 결말이다. 허나 시즌2에선 더 넓은 세계관을 묘사하며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고귀한 가치는 단순히 괴물로부터 탈출에 성공하는 아이들의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괴물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엠마 일행의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였다.
평생 숨어서 살아가는 것. 이 방법은 현실적이고, 안정적일 수 있으나 미래가 없으며 엠마가 원하는 ‘모든 식용아를 살릴 수 있는’ 길도 아닌다. 괴물에 저항하는 방법은 가장 적합하지만 그들은 괴물에 비하여 너무도 나약하다. 마지막 방법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엠마 일행이 위기에 몰렸을 때, 그들을 구해준 괴물과 이야기하며 엠마는 각성하게 되며 마지막 방법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그 괴물들은 종교적 이유로 인간을 먹지 않으며, 인간을 먹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괴물의 지배계층에게 들키면 그들은 살아갈 수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을 먹는 행위는 지배계층의 지배 이념이란 것이다. 그들의 지배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농원을 운영하고, 인간 사육을 하는 것이다. 괴물들이 인간의 고기를 필요로 할수록 그들의 정치와 체계는 견고해진다.
작의 후반부터는 엠마와 연대하는 괴물을 하나둘씩 만난다. 이는 엠마에게 괴물의 재정의하는 계기가 된다. 괴물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지배계층의 이념으로부터 인간을 먹어도 되는 것으로 자각하게 된 민중이다. 고로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민족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시간성은 엠마가 괴물들을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그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이 괴물을 개체로써 수용하는 무언의 포용이다.
결국, 모든 것은 괴물과 인간 사이의 대립이 아닌 것이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대립 관계는 더더욱 입체적이고 초반과 다른 방향으로 표현된다. 괴물과 인간의 대립이 아닌, 즉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욱 우월한 객체가 하등 한 객체를 먹어도 되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갈등이 아닌 공생할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는 이들과 이를 막아야 하는 ‘적’들의 싸움인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층을 향한 피지배계층의 투쟁이다. 연대하고, 싸우고, 소중한 이를 잃어본 엠마는 모든 사실을 깨우치고 두 종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길을 위해 또다시 나아가며 끝난다. 그렇게 마지막 방법을 택한 엠마는 비록 애니에선 빠르게 넘어갔지만-또 다른 엄청난 서사의 시작인지라 하나의 시리즈 안에 담아내지 못한 듯하다. 원작에서 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괴물들을 설득하고 인간 세계에 도착하게 된다.
모든 세계사적 투쟁의 불씨는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시작된다. 자유를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고귀한 것이며 많은 문학을 통해 그려진다. 결정론적인 비관을 극복하는 약속의 네버랜드 역시 그렇기 때문에 고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