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모두가 비운 오전 시간 손마사지기 충전 중에 스파크가 일어나30분 만에 거실과 부엌의 모든 세간살이를 태웠다.
다행히 모두 보험처리가 되었고두 달여 수리기간 동안 네 식구가 원룸에서새해를 맞으며 곧 있을 입주 전에 가전제품 구매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전은 어디가 싸더라 저기도 싸더라 의견이 분분하다가집안에서 목소리가 큰 처남이 백화점에서도 온라인 최저 가격을 다 맞춰준다며
본인이 나서서 백화점 가전매장에서 흥정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화재보험금으로 백화점 가전제품을 2천만 원 가까이 구매하면서골드클럽이라는 VIP 멤버십이 되었다.
평소에 백화점은 비싸다는 선입견에 특별한 날 아니면 가질 않는 곳이라 1년에100만 원도 안 쓰는데다얼마 전까지만 해도화마가 온 재산을 삼켜서 이불 한 채 수건 한 장 없던이재민이었는데 백화점 VIP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싶었다.
골드클럽이 되면VIP 전용 주차구역에서 발렛파킹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전용 라운지에서 커피, 차와 간단한 스낵을 먹을 수 있으며 명절이면 수건이나 육포 같은 소소한 선물을 택할 수 있다고 한다.
백화점 VIP 스티커가 집으로 날아왔고 암행어사 마패라도되는 양 스티커를 자동차 앞유리에 떡하고 붙인 후 눈길도 안 주던 VIP 주차구역으로 몰고 들어갔다.
발렛파킹 직원의 정중한 수신호에 따라 정차한 다음 전용통로를통해 매장으로 입장하면서 괜히 으쓱해졌고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며 화재 이재민이었던 우리 처지가 이렇게 바뀌었다며 롤러코스터 같은 일상에 대해각자의 소감을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공짜 발렛파킹과 커피에 재미붙여매 주말마다 백화점 나들이를 하다 보니 내가 정말 VIP 인 것 같았고 소비도 VIP처럼 해야겠다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월급은 그대로였지만 100만 원 남짓한 주식 수익 현황에 힘입어 70만 원짜리 다이슨 청소기를 질렀다.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농수축산물 대부분 상품의 가격을 외고 있어서마트의두 배 가격인 백화점 식품매장가격을 보면 볼수록 기가 찼다.
"미쳤다 미쳤어 아무리 드라이에이징 한우라고 하지만 100그램에 이만 오천 원이래!"라며 집사람에게 고자질하듯 말하며 식품매장을 나온다.
명품 매장 내 구찌, 버버리 샵 앞에 기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기다리면서까지 살게 있나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다가마침 줄이
없는페라가모 샵에 들어섰다가 한 개에 60만 원 하는 벨트 가격을 보고는 조용히 말없이 나온다.
그렇게 납득이 안 되는 가격만 확인하고는 기껏 우유, 식빵, 만두 같은 먹거리만 사들고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다들 명품 쇼핑백을 너댓 개씩 주렁주렁 들고 VIP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발렛직원에게 자랑하듯
쇼핑백을 건네고는 벤츠나 BMW 같은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수입차에한가득 산 쇼핑백이 실리는 것을 확인한 후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떠나가기 마련인데
우리만 먹거리 뿐인 종량제 비닐봉지라서
"짐 들어드릴까요?" 라며 손을 내미는 발렛직원의 친절에 내 치부가 드러날세라 '아니에요 아니에요' 라며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절을 한다.
주차장 내 탑승 대기공간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게 우스꽝스러워 편히 앉지도 못하고 일어선 채 우리 차가 나오는지 밖에만 주시하다가 세차한지 두 달도 넘어 뽀얀 먼지에흰색이지만 누런 카니발이움직이기 시작하면 차량이 준비되었다는 발렛직원 호출도 전에 탑승장으로 나가서 손님인 내가 오히려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하며 황급히 빠져나오기 마련이다.
백화점 매장 안에서야 빈 손이라도 상관없지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VIP 주차장에 들어설 때면
'너 오늘 얼마나 샀니?'
'얼마나 많은 쇼핑백을 들고 왔니?'
와 같은 구매액수 검색대에 올라선 듯한자격지심이 들고먹거리뿐인 비닐봉지를 든 내가 한없이 초라한 것 같아 위축되곤 했다.
그렇게 쇼핑이 점점 스트레스가 되어가던 차에 지난 주말 집사람이 백화점 앱을 열어 보여주며
VIP 멤버십 연장을 하려면 연간 2천만 원을 써야 하는데 올해 누적 구매액이 200만 원이 안된다고 했다.
공짜 발렛파킹과 라운지 음료에 재미가 단단히 들어서 '무슨 수로 1,800만 원을써야 하나?'
'명품 시계라도 사야 하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었다.
사실 내 소비패턴은 대형마트 의무휴무일인 둘째 넷째 주 일요일 하루 전인 토요일 밤에 가서
8천 원에 세 마리하는 오징어를 5천 원에 사면서 기뻐하고 창고형 아웃렛에서 정상가 30만 원 하던 니트를 80% 할인된 6만 원에 사고는 돈 벌었다며
뿌듯해하는 지극히 가격 위주체리피커였는데 어쩌다가 화재 보험금으로 어울리지 않는백화점 VIP 멤버십 클래스에 들어가면서부터 쇼핑 정체성
의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어나더 레벨의 백화점 명품소비와비교해가면서나를 초라하게 여기고 그들처럼 될 수 없음에 답답해하면서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는 게 마치 백화점이 만든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또 다른 456번이 아닌지 반문하게 되었다.
주차는 내가 직접 하면 되고 커피는 돈 주고 사 마시면 된다.그것 때문에 능력도 안되면서
2천만 원을 써야 한다는 강박 가득한 시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VIP 멤버십 종료두 달 앞두고 깨닫게 되었다.
백화점은 나를
Very Important Person이라고 추켜 세워줬지만
실상은 Very Incapable Person이었고 그런 나는 Very Intelligent Person이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