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족은 해체되었다. 부부는 원수가 되고 부녀는 남이 되어 갈라섰다. 이 가족은 박살났지만 아버지가 새로 만든 가족은 어디선가 환히 웃으며 가족 사진을 찍고 있겠지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의미 없는 대화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늘 짜증 나고 답답하다.
엄마와 이혼 후 만나는 빈도는 줄었지만 강도는 여전하거나 더 높아졌다.
내 또래들은 아버지와 꽉 막혔던 감정 장벽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이해하게 되고
대화가 통하기 시작했다며 다만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에 안타깝다하는데 내게는 딴 세상 얘기이다.
아버지와 대화 단절은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취향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는데
첫째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안동에서 2년 정도 지방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당시 40대 후반 아버지는 영남 유림 한학자라도 된 것처럼 서원과 맹공자 그리고 안동 김씨, 경주 최씨, 의성 김씨 같은 가문과 족보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야자와 학원으로 돌다가 서태지가 막 나오던 시절이라 주말 쇼 프로그램이 더
절실했을 때 양반 사대부 얘기는 내 관심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둘째는 아버지가 퇴직을 한 무렵었는데 그때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라 머리는 굵었지만
취직 전이라 경제적으로 위축된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퇴직 후 정체성을 잃고 예민했던 시기로 추측이 되는데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 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본인이 나서서 발족한 ‘OO발전협의회’, ‘OO초등학교 총 동창회장’ 이런
타이틀을 만들어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전부가 가계 수입에 도움은커녕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을 내놓아가며 하는 일인지라 늘 엄마와 갈등이었고 내가 엄마 입장을 대변하려 하면 ‘너는 빌빌대지 말고 빨리 취직이나 해라’라는 약점을 후벼 파서 눈을 지릅뜨게 만들었다.
셋째는 아버지가 복지관을 다니기 시작한 육칠년전인데 이제 더 이상 불러주는 곳도 없는 칠십 노인이 된 아버지는 왈츠, 탱고 같은 댄스 스포츠를 접하며 취미를 만들어갔다.
그런 취미는 같은 클래스 할머니들과 연정으로 번졌는데 국영기업에서 퇴직 후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양반 사대부 근원을 읊어대는 박식한 할아버지 스펙이라 가능했지 싶다.
엄마는 외손주 보느라 동생네에 있어 집을 자주 비웠고 당연히 자주 혼자였던 아버지는 복지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때에 따라 안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처럼 표현한듯하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멀어져 가는 부부는 아버지가 춤추다 만난 화려한 할머니와 다녀온 지중해 크루즈 여행 일정표를 엄마에게 들키고 난 후 갈라서게 된다.
그런 파국을 원한 아들이 누가 있겠냐마는 사태가 벌어지고 난 다음에도 아버지는
‘그깟 일 뭐 대수냐? 내가 첩을 들였냐? 잠깐 한눈 좀 판 거 가지고 여자가 집안 소란스럽게 하는데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살다보면 다 이해되고 그러는거지 왜 분란을 일으키냐?”
라는 유체이탈 화법 발언으로 수습해보려는 내 속을 다 뒤집어 놓아 마치 조선시대 벽창호 남존여비 할배가 환생한 느낌이었다.
엄마는 이혼 카드로 겁만 주고 아버지로부터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아낼 생각이었지만
그런 뻔뻔한 태도에 오히려 이혼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법정에서 재산분할로 옥신각신하며 44년 부부관계가 산산이 깨진 후 2년간 우울증에 시달리다 작년부터 조금씩 회복해가고 있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아버지하고 일체 연락을 끊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나밖에 없는 것 같아 명절이나 계절에 한 번씩은 손자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지려 한다.
그러던 중 지난 주말은 아버지의 일흔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고기 사주겠다고 어르고 달래서 잠이 덜 깬 아이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는 지난봄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 훌쩍 큰 손자 둘을 보고 대견해하면서 두세 번 가본 한우 정육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아버지는 안면이 있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카드를 건네며 계산을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삼대가 같이 오셨다며 아는 체를 하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그때 그 아드님이 아니시네? 그땐 좀 더 홀쭉했었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맞은편 아버지 표정을 보니 당황해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겨우 꺼낸말이
“무슨 소리 그때 그 아들이 맞아요 아들은 하나요” 이러는 거였다.
아주머니는 갸웃갸웃하며 계산하러 가고 나는 쥐고 있던 젓가락을 놓았다.
아버지는 “네가 살이 많이 빠졌을 때 왔나보다.' 라는 있었던 적도 없는 얘기를 하며 무마해보려 했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내가 뭣하러 왔나 하는 생각에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빈속에 첫끼라 연신 차돌박이 된장국물을 밥에 끼얹어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민망하고 아득할 테고 아들은 실망스럽고 배신감을 느끼는 복잡한 부자간 감정이 소리없이
흐를 때 아주머니는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 종이로 감싼 카드를 내밀며 “할머니는 잘 계시죠?” 하고는 하던 일을 하러 간다.
‘아! 아버지'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 식곤증에 졸릴 법 도한데
‘도대체 얼마나 단란한 가정 모습이었으면 식당 아주머니가 홀쭉한 아들이었다고 기억을 했을까?’
하며 기억을 되씹으니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의 아내이고 그 모든 사람들이 또하나의 가족이라하며 식당에서 하하호호하는 장면이 연상 되어 슬프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어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저는 전처소생이에요”라고 해야겠다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