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27층까지 인데 38층이 어디 있다는 말이야? 했지만 눈치껏 회사 위에 존재하는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조직인가 싶었다.
누구는 38층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37층이라고 하는데 내 주변에서는 38층인지 37층인지 암튼 그곳에 가본 사람이 하나도 없어 우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층수가 헷갈릴 만큼 신비로운 곳일 뿐만 아니라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38층에서 호출이 있다고 하면 사내 쟁쟁한 팀에서 난다 긴다 하는 베테랑들이 모여 몇 날 며칠을 세워가며 보고서를 만드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피땀 어린 보고서를 가지고 우리 회사 Top 3안에 드는 분이 38층 다녀온 후기를 건너 건너 들어보면 '보완 후 재보고'라는 또 다른 피땀 어린 보고서를 요구하는지라 다들 허탈해하며 소문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곤 한다.
우리는 왜 지시를 한 조직명칭과 사람을 명확히 하지 않고 애매하게 은어 같은 38층이라는 장소를 내세워 권위화하여 말하는지 생각해봤다.
이런 사례는역사적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군사정권 시대에 "남산으로 모시겠습니다." 라던지 '서빙고로 오셔야겠습니다.' 등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말로만 모시겠다 오셔야겠다 뿐이지 실상은 그곳에 가면 엄청난 고초에 시달리고 때론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곳이라 장소로 의미 전환한 폭력의위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일일드라마에서 전화를 받으며 '청담동입니다.' '성북동입니다.'라는 것도 부(富)가 장소로 의미 전환하여 권위를 내세우는 게 아닌가 싶다.
일일드라마 셋트장 이런 곳에서 클래식 전화가 울리면 일하시던 분이 재빨리 달려와 '네 청담동입니다.' 라는 대사를 치곤했다. 예전에
최근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다고 해서 언론에서는 용산과 청와대를 결합한 용와대라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만들어내어 분분한 의견 한 가운데 있는데 이 역시 권력과 장소가 결합된 권위의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회사로 이직하기 전 직장은 외국계 회사였는데 그곳 역시 전 세계에 지사가 있는 글로벌 그룹이었지만 특정 장소에 위치한 조직을 내세워 업무를 지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한다.
대신 외국계에서는 누가 지시를 했고 그 지시에 누가 피드백을 가져올지 기대한다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점은 동서양의 대화법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치아가 아파서 치과에 갑니다.' 라며 행위와 대상이 생략된 채 장소를 얘기하지만 서양에서는 '치아가 아파서 치과의사를 만나러 갑니다.'라며 행위 대상자인 사람을 얘기하고 있다.
유튜브 오픽 선생님이 알려준 대화법 차이인데 상징적이며 집단에 중심을 둔 동양문화와 구체적이고 개인에 치중하는 서양문화에서 비롯된 대화법이라 할 수 있다.
아마 OO그룹 38층은 이러한 동양의 문화적 특성과 수십 년에 걸쳐 권위를 장소화하여 칭하는 우리가 만든 모습이 아닐까 싶다.
정작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OOOO팀 OOO프로 일 뿐 비슷한 월급쟁이 고민을 겪는 사람들인데 그 주변부에서 권력을 부나방 같이 좇는 사람들이 권력을 동경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그렇게라도 부르면 자기가 36층쯤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시작된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