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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쫌생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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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던컨 Apr 23. 2022

20점짜리 인생

밀려드는 큐레이션에 정말 내 취향을 알고나 저격을 하는지 의구심 가득했던 넷플릭스였는데 추천이라고 떡 내놓은 '나의 해방 일지' 푹 빠져들게 되었다.


잔잔한 드라마 전개 가운데 공감했던 부분이 주인공 염미정(김지원)이 만신창이 같은 마음으로 직장에서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의 독백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20점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 가야 하는데, 꺼내진 못하고 시험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보면 마음이 돌덩이같이 무거웠어요

해결은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


"지금 상황에서 왜 그게 생각날까요? 뭐가 들키지 말아야 하는 20점짜리 시험지인지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돈 꿔준 바보 같은 나인지, 여자한테 돈 꾸고 갚지 못한 그놈인지, 그놈이 전여친에게 갔다는 사실인지


그냥 내가 20점짜리인 건지....."



김지원은 쌍꺼풀이 매력인 것 같다.


내게도 국민학교 1학년 때 2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 들고 부모님 사인을 받아와야 하는 그런 막막한 날이 있었다.

문제 쪽지시험이었는데

시침과 분침을 알지 못했던 나는 아무 개념 없이 나만의 기준에 따라 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각은 알지만 분침의 이동에 따라 시침이 애매하게 움직여서 혼란스러웠다.

9시 인 것 같기도 하고 10시 인 것 같기도 하고

누런 갱지에 먹물로 인쇄한 시험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시침이 10에 가까우니 10시 30분이다.라고 부담 없이 답을 적어냈고 그랬던 문제가 10개 중에 8개나 되었다.

그래도 10개 중 정각문제 2개  맞춰서 20점이었다.

학교가 파할 무렵 선생님은 채점한 시험지를 나눠주며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내 짝은 90점을 맞아서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20점을 맞은 내게는 염미정의 돌덩어리 같은 시험지였다.


문제가 왜 틀렸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 시험지를 보여드리면 엄마가 어떤 반응일지가 더 걱정이었는데 "그러게 진작 진작 시간문제 풀어보라고 하지 않았냐? 판판 놀다가 이게 뭐냐?' 하면서 엄마는 화를 부글부글 끓이다가 회초리로 번질 테고 매타작에 나는 눈물 콧물 범벅으로 악을 쓰며 울다가 울음은 잦아들어도 울음 딸꾹질은 멈추지 않아 냉수를 몇 잔이나 들이켜고 나서야 진정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풍파가 몰아친 다음 고요하고 냉랭해진 집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일일 공부 시험지를 죄책감에 양심상 열 장이 넘게 풀고서야 '이제 그만하고 자라'라는 명령을 듣고나서야 몸을 뉘일 수 있을 테고 다음 날 아침 '이번만 특별하게 사인해주는 거다. 또 이런 시험지 받아오기만 해 봐라'라는 협박성 멘트와 함께 인된 시험지 받아들수 있을것이다.


시험지를 가방에 넣으며 곧 있으면 내가 겪어야 할 모습이라니 까마득해졌다.

책걸상을 정리하고 일어서는 도중 바닥에 떨어진 내 짝의 90점짜리 시험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험지를 흘리고 집에 간 모양이었다.

'저 시험지가 내 시험지라면'쿵쾅쿵쾅 아직도 그때의 심장 박동이 기억난다.

조금만 뻗치면 움켜쥘 수 있는 유혹과의 거리 10cm 일 때의 심장박동이었다.


난 그 시험지를 줏어들고 시험지에 적힌 내 짝의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적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지워도 누런 갱지에 내 짝의 이름 선명했 그럴수록 지우개 똥이 부풀어나게 힘줘서 밀어시험지는 구멍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아이들이 다 가고 없는 교실에서 시험지와 낑낑대는 내 모습을 본 담임선생님은 내게 가까이 다가왔고 지우개에 집중하던 나는 '너 뭐하니?' 하는 소리에 선생님 눈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생님박박 지우고 있던 내 짝 시험지 보고나서야 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다음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분명한 건 그 90점짜리 시험지는 다시 선생님께 맡겨졌고 난 원래 시험지를 가지고 집에 갔었는데 예상했던 큰 푸닥거리는 없었다. 아마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시험바꿔치기 미수사건을 알린 듯했고 엄마는 시험점수보다 내 인성에 더 충격을 받아 조용히 넘어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날 20점짜리 시험지 90점짜리 시험지로 바꿀 수 있었다 해도 엄마는 아들 이름 지워지지 않은 남의 아이 이름을 볼수 있었을테고 른 글자체로 답이 씌여진 시험지를 보고 충분히 남의 아이 시험지란 걸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도 20점짜리로 여겨질 때가 참 많다.

그런 인생이 싫어 90점짜리 인생으로 치장한들

나 혼자만 90점짜리 인생으로 바라봐주겠지 하는 생각일 뿐 정작 남들은 20점인 내 인생을 꿰뚫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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