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자라고, 우리는 작아지는 시간
봄을 맞아 온 가족이 옷장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언젠가는 입겠지' 하는 미련에 몇 해 동안 묵혀두었던 옷가지들을 하나둘 꺼내니,
안방 바닥은 금세 옷더미로 가득 찼습니다.
그 속에는 23년 전, 풋풋했던 신혼여행을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맞췄던 커플룩부터,
조금만 살을 빼면 다시 입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청바지,
그리고 목이 늘어나고 보풀이 일어난 해진 티셔츠까지…
우리 가족의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지를 들이밀어 보았지만,
역시나 야속한 옷은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련을 접고 오래된 옷들을 하나씩 비닐봉지에 담았습니다.
*아이들의 성장을 마주하다
거실 한켠, 둘째 아이의 옷장도 열렸습니다.
유독 예민해 택을 떼어버린 옷이 많아, 아이가 일일이 입어보며 선별해야 했습니다.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어 훌쩍 커버린 아들이 초등학생 때 입던 옷을 걸치자,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한창 축구에 빠져 살았던 시절 아끼던 축구복은 이제 몸에 꽉 끼는 '쫄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작아진 옷을 용케 꿰어 입은 아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를 옷이 도저히 따라잡지 못한 모양입니다.
큰아들의 교복도 꺼냈습니다.
남편은 교복 곳곳에 새겨진 아이의 이름을 칼 끝으로 정성스레 뜯어냈습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거니 보관해 왔지만, 이제는 정말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이지요.
그 와중에 생활복으로 입던 체육복은 남편의 차지였습니다.
"집에서 입으면 딱 좋겠네"라며 챙겨두는 모습에 다시 웃음이 났습니다.
사촌들에게 물려받았던 옷들도 하나씩 입어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겐 작아진 옷이 이제는 나나 남편에게 제법 잘 맞았습니다.
어느덧 우리 집에서 남편과 내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습니다.
*비움으로 채우는 새로운 봄
첫째 아이의 옷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옷장에도 세월의 흔적은 역력했습니다.
색이 바랜 흰 티셔츠와 목이 늘어난 옷들을 정리하며 아들도 자신의 시간을 함께 덜어냈습니다.
거실 가득 쌓인 옷더미를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몇 년간 손도 대지 않은 옷들을 정리하는 것이 맞지만,
옷 한 벌 한 벌에 깃든 기억 때문에 선뜻 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몸에 맞는 새로운 옷들을 들이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 가족의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움이 필요했습니다.
옷을 하나씩 입어보고 정리하는 동안 장성한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러다가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남편과 나의 낡은 옷들을 보면 묘한 서글픔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정리는 단순히 옷을 버리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고, 부쩍 자란 아이들의 현재를 확인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기 위한 행복한 채비였습니다.
비워진 옷장만큼 우리 가족의 새로운 이야기가 그 자리를 채워나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