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수건이 가르쳐준 마음공부
3월,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일상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두 아들의 아침밥을 챙기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는 루틴 속에,
온라인 자격증 시험이라는 커다란 과제까지 더해졌다.
다행히 남편이 집안일을 나누어 맡아준 덕분에,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일정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엔 작은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자격 과정의 마지막 시험 날.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노트북 앞에 앉았다.
제한된 시간 내에 답안을 채워 넣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정신없이 집중하는 나를 도와주겠다며 남편이 곁에서 자꾸 말을 걸어왔다.
“아니, 조용히 좀 해봐.”
날 선 목소리가 나갔다.
다가오던 아들에게도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손사래를 쳤다.
시험이라는 긴박함에 쫓겨, 내 곁을 맴도는 가족들의 다정한 소음이 그저 방해로만 느껴졌던 모양이다.
간신히 시험을 마치고 책상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안일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한쪽에 놓인 수건을 만지다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수건 이거 왜 젖었어?"
"오늘 빨았다고 말했잖아."
"아니, 수건 하나가 너무 축축해서 물어봤지."
"다 같지 뭐가 더 축축해!"
"만져봐. 이게 두꺼워서 그런가 더 축축해."
평범한 대화였어야 할 말들이 팽팽한 공기 속에서 튕겨 나갔다.
남편은 인상을 썼고, 평소보다 높아진 그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예상치 못한 남편의 큰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괜히 고개를 숙여 거실 바닥을 한 번 닦아내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젖었는지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물어봤다면, 남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웠을까?’
서운함보다 먼저 든 생각은 내 화법에 대한 반성이었다.
시험 때문에 곤두서 있던 내 예민함이, 하루 종일 나를 대신해 살림을 돌본 남편의 수고를 '취조'하듯 건드린 것은 아니었을까. 비난할 의도가 없었더라도, 지친 상대에게는 내 질문이 화살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우리 부부의 '밴드'를 열었다. 다시 남편에게 말을 걸기는 싫었고,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의 앙금이 남을 것 같아 조용히 글을 적어 내려갔다.
< 남편의 마음이 궁금해서 밴드에 남긴 글 >
인상 쓰고 큰 소리 낸 당신의 마음이 너무 궁금합니다.
이유를 생각해봐 주세요. 어느 부분에서 갑자기 욱! 하고 올라왔는지요.
당신 마음의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1. 빨래를 빨았다고 퇴근길에 이야기했는데 기억을 못 해주는 것 같은 나의 질문에 속상함?
2. 빨래했다 했는데 자꾸 깜빡깜빡하는 아내에 대한 걱정?
3. "왜 젖었어?"라는 질문이 추궁하는 듯 들려 갑자기 짜증이 남?
4. 빨래 이야기 전에 상황에서 내일 운전연습하기로 했는데 아들 술약속에 장거리 계획을
한 운전 연습을 하지 말라는 나의 말에 서운함?
5. 빨래 이야기 전에 상황에서 내가 시험 보는 거 도와주려는 당신한테 정신이 없어 툴툴거렸던
말들에 속상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 함께 갑자기 화가 남?
이거 말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 봐요.
만약 위에 5가지 중 이유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면 눈물 많은 내가 조금은 덜 속상하고 덜 슬플 것 것 같아요.
1번 이유
"아까 오늘 빨래했다고 말했는데 기억을 못 해주니 속상하네."
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요.
2번 이유
"허허, 자꾸 깜빡깜빡하면 안 돼. 내가 걱정되잖아."
3번 이유
"왜 젖었어하니까 내가 뭐 잘못 한 줄 알고 기분이 안 좋았어. 다음에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봐줘."
4번 이유
"운전 연습 계획 제대로 준비했는데 하지 말라니까 좀 서운하네."라고 그때 감정을 먼저 이야기했다면 빨래건에서 화가 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5번 이유
"도와주려고 한 건데, 고맙다 안 하니까 좀 서운하네."라고 이야기를 해줘요.
(요건 지금이라도 내가 아까 툴툴거리건 사과할게. 아까 시간이 부족으로 마음이 급해져서 조금 짜증 난 말투로 말해서 미안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에 이유가 있다면 속상했던 내 마음을 위해서 말을 바꾸어서 댓글로 남겨줘요.
내가 쓴 표현을 붙여 넣어서라도...... 댓글 부탁합니다.
내가 생각한 이유가 없다면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댓글로 남겨줘요.
꼭꼭 꼭 부탁해요........
밴드에 글을 남기도 나는 이제 남편의 댓글을 기렸다.
내가 건넨 다섯 가지의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고, 혹은 내가 미처 몰랐던 남편만의 속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우리가 '왜 화가 났는지'를 찾는 일이었다.
“여보, 당신의 마음 소리를 들려줘요.”
남편이 밴드에 댓글을 남겼다.
"5번과 3번이 섞였어. 그렇고 나도 이래저래 기분이 다운되어서 그런 것 같아.
욱해서 미안해. 사과 바로 못해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있나 봐. 점점 욱하는 게 많아지고 있는 게 느껴져.
스트레스를 풀어 주어야 할 듯합니다."
남편의 답에 나도 답을 남겼다.
"당신도 알다시피 수요일부터 계속 잠 못 자고 시험 보니 나도 피곤하고 힘들고 60분 안에 끝내려니 긴장되고 짜증이 났어.. 그래도 덕분에 몇 문제는 맞혔어. 고마워..
이렇게 감정 원인을 찾아가니 서로 이해하게 돼서 좋네.
감정은 해결하지 않으면 그렇게 갑자기 욱 올라와.
화, 짜증 나는 원인을 찾아보는 연습을 계속하자..
안 그러면 애들 앞에서 별일 아닌 것에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생겨..
나도 어제 자기 모습에 화가 나긴 했어... 그 화의 원인은
나이 들면 더 욱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무섭기도 해서....."
남편은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니, 왜 그토록 날카롭게 반응했는지 비로소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묻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영영 알지 못한 채 며칠 동안이나 차가운 정적 속에서 서먹함을 견뎌야 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왜 화가 났는지, 그 짜증의 실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더 크고 날카로운 화를 쏟아내게 된다. 표현하지 못한 채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전혀 상관없는 소소한 일들을 타고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이번 일은 우리 부부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주었다.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 파도에 휩쓸리기보다 잠시 멈춰 서서 '지금 내 마음이 왜 이럴까?'라고 묻는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약속했다.
바쁜 일상에 치여 가장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젖은 수건 한 장이 불러온 소동이었지만, 덕분에 우리 마음의 습도는 한결 쾌적하고 뽀송뽀송해졌다.
*AI이미지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