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꼭 이맘때쯤이었다.
보건소에서 계약직 '활동지원사'를 지인분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는 첫 활동지원사였다.
3개월 계약직 활동지원사는
우리 동네에 사시는 여사님이었고,
중년 후반쯤 되어 보였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선생님은 청소부터 시작하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얼마 돌리지도 않아 바닥에 철썩철썩 주저앉는 거였다.
일하는 것이 너무나 버거워 보여
오히려 내가 도와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루에 3시간밖에 되지 않으니
시간은 후딱 가는 듯싶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손맛이 느껴진다.
무슨 요리를 하든 친정엄마의 손맛이 나는 듯싶어 그것이 나는 좋았다.
일주일이 되었을 때였다.
선생님은 내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신다.
"나 말이지, 사실은 '자궁암'이야."
"뭐라고요?"
"내가 사는 게 워낙 힘들어 주위에서 일거리를 만들어 주신 거지."
"그랬나요? 처음부터 좀 이상했어요."
"정말 미안해.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닌데..."
갑자기 멍해진다.
돌려보내야 할지,
그냥 3개월을 채우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청소기 하나 돌리는 것도
몇 번씩 쉬어가면서 하신 거였구나.
한참 고민 끝에 그냥 일을 하시게 했다.
그러자 고맙다면서 더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도 그분이 우리 동네에 계시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냥 건강하게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가난도 누구나 가능한 일이 다라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달쯤 되었을까?
갑자기 소식도 연락도 없어서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을 때
다시 연락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미안해서 일을 못하겠다는 거였고
정중한 사과와 함께 뒷모습을 보이던
첫 지원사 선생님이었다.
그 후, 다른 지원사도 소식이 없어 그냥 지내고 있을 때
센터에서 연락이 오면서
다시 활동지원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늦은 나이지만 그때의 나는
특수학교 학생 신분으로 생활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늘 찌개는 김치찌개고,
빨래는 걸레와 같이 빨으시다 보니 빨래는 엉망이고,
심지어 활동지원서비스 바우처 카드를
들고 다니시다가 그만 분실하셨다.
내게 재발급해 달라고 요구하셨고,
그래서 재발급 하자 다시 가지고 다니시는지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원래는 이용자의 카드를 들고 다니면 안 된다.
근무시간을 다 채우지 않아도 남은 시간까지
다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인 나는 그걸 인식하기 어려웠고,
일이 이미 벌어졌을 때 그제야 알아챘다.
센터에 이 사실을 전하려 몇 번이나 통화를 했었지만,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했다.
몇 차례 도전 끝에 억지로 연락이 되었고
그 사실을 솔직하게 전했을 때
그 선생님은 그만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카드를 돌려받을 때 지원사 선생님이 기분이 나빴는지
카드를 던지며 내게 화를 내고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