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자의 아침

너의 휴대폰, 나의 브런치

by 혜준

어제는 아들에 이어 딸아이 학교의 보호자 회의가 있어서 학교에 다녀왔다.

회의에 가 보니 딸아이가 입을 꼭 다물고 있어서 나만 모르는 것 같은 학교의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지난달 치러진 모의고사 성적표는 이미 배부되어 있었고, 봄방학에 실시되는 보충수업 스케줄과 이번 주까지 마감되는 수업 신청, 참가하면 도움이 될만한 학교 행사 등등....

집에 와서 딸에게 물으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겠지..."엄만 관계없잖아"라고.

왜 관계가 없니.... 엄마잖아...

난 무서운 욕도 싫지만, 이런 차가운 말이 더 무섭고 싫다.

그래서 집에 와서도 딸에게 "왜 엄마한테 이런 중요한 얘기를 안 했어?" 하고 묻지를 못한다.

지가 필요하면 해달라 하겠지.... 하고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려고 애써 본다.

애는 쓰지만 역시 어렵다.


회의가 끝나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엄마들과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힘듦을 토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딸아이에겐 이미 엄마들에게 자기 다이어트하는 얘기는 하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으니 그 이야기는 빼고, 너무 아이의 인권을 무시하는 발언은 빼고, 너무 주관적인 내 판단은 빼고.... 하다 보니 별 할 말은 없을 것 같은데, 한국, 중국, 일본의 세 엄마가 모여 수다를 시작하면 언제나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간다.

항상 아이 성적에는 처연했던 중국 엄마가 어제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동안 등교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 가기를 어려워하던 일본 엄마의 딸은 미술로 진로를 정하고 나서는 학교를 잘 다니기 시작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고, 나는 학원을 간다고 하고 엉뚱한 곳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딸아이의 걱정을 털어놓았다(인권침해일까?).

결론은 없지만 시원한 맥주 한 잔(혹은 그 이상)으로 이렇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우리는 또 달릴 힘을 얻는다.


집에 돌아오니, 딸아이가 무슨 말했어? 하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속으로 "네가 무슨 상관이야"하고 쏘아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빙긋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 엄마의 그 딸, 그 딸의 그 엄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조용한 시간, 노트북을 열고 딸아이의 휴대폰 시간을 보니... 어머나...사용시간 5시간이 넘어 있다.

내가 엄마들하고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 딸은 자기 방에서 휴대폰으로 신나게 시간을 먹었나 보다.

조용한 평화가 일순 커다란 불안의 파도로 넘실댄다. 당장 가서 이불을 걷어 내고 며칠 후에 있을 기말고사는 어쩌려고 저쩌려고 일장 연설을 하고 싶은 마음을 또 한 번 누른다. 소용이 없다는 걸 3년간의 학습으로 알아 버렸으니까. 잘 참은 나를 칭찬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참는 게 능사일까... 하는 뒤이은 작은 불안의 파도를 느낀다.


내가 이렇게 네가 잠든 밤 몰래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비밀로 하듯이, 네가 엄마 없는 동안 몰래 휴대폰과 노는 걸 비밀로 해 줄게.

그리고 딸아, 덤으로 엄마가 이렇게 브런치에 네 사연을 몰래 넋두리하는 비밀도 용서해 줄래?

그럼, 아침에 엄마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를 향해 방실방실 웃으며 "오하요~(잘 잤어?)"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결백하지 못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이의 비밀을 모른 척하는 이 비겁한 평화를 나는 앞으로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