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취급설명서를 쓰게 되는 부모의 마음
오늘 낯선 편지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발신인을 보니 아들이 작년 해외 연수로 간 호주에서 신세를 진 호스트 패밀리 엄마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여름 방학 3주간 가는 프로그램이었다. 호주의 애들레이드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부모 떠나 낯선 가족과 생활해야 하는 아들이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영어는 물론이고 편식이 심하고 덩치에 안 어울리게 부끄럼도 타는 아들이 호스트 패밀리와 소통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친척들 앞에 서면 입을 꾹 다물고 발가락만 꼼지락대던 아이였다.
그래, 아들아! 이번 기회에 한 번 껍질을 깨고 강해지거라!! 하고 태연하려 했지만, 여행 준비를 하는 것보다 이 녀석이 호스트 패밀리에게 천덕꾸러기가 되진 않을까 애기 때도 안 했던 가정교육(?)을 하느라 동동거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 호스트 패밀리에게 뭘 선물할까 이것저것 뒤져 보곤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정성을 들인 것은 물건보다도 이 샌님 녀석이 오해를 받지 않도록 취급설명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표정도 별로 없고 요구 사항이 있어도 꾹 참고 버티고 무뚝뚝한 아들이 그쪽 가족에게 사랑을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3년이라면 모를까 3주간 같이 있으면서 아이의 성격과 진심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아무튼 장문의 편지를 작성해서 아들에게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제일 먼저 선물과 함께 전달할 것을 당부 또 당부했다.
3주 후, 아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을 했고 "엄마, 세상이 넓은 걸 알았어"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호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노코멘트였다.
배운 게 달랑 그거 하나라고??? 세상이 넓다는 걸 호주에 가기 전에는 몰랐더냐.....
무사 귀국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던 나는 엉망진창 카오스 상태의 슈트케이스를 열자마자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구겨질까 봐 고이고이 싸서 넣어 둔 벚꽃 만발한 아들 취급설명서가 가방에 그대로 들어 있지 않은가!!!!
편지에 온 마음을 담고 싶어서 사전에 메일로 연락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스트 패밀리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 이 녀석과 그의 부모는 뭔가? 했을 것이다. 이렇게 덜렁 아이를 맡긴다고? 하고....
3주 만의 상봉으로 차올랐던 애틋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모자관계는 빛의 속도로 3주 전의 '잔소리 모드'로 복귀되었다.
서둘러 덕분에 잘 지내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감사 편지와 함께 아들이 고이 모시고 온 아들 취급설명서를 동봉해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 편지의 답장이 오늘 호주에서 도착한 것이다. 편지에는 아빠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답장이 늦었다는 사과와 아들의 어리숙함을 호탕하게 웃어 주고 3주간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더니 결국 친해져 같이 뛰놀며 즐겁게 보냈다는 사연이 담겨 있었다.
고, 고양이들?
아들아... 너의 연수 목적은 무엇이었더냐.... 본전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엄마는 "세상은 넓고 고양이와의 소통에 영어는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온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편지를 쳐다보고 있자니 호스트패밀리 가족에게 환영받길 바라며 이것저것 챙기고 했던 지난여름이 떠오르면서 뜬금없이 옛날 딸을 멀리 시집보낼 때의 친정엄마들의 마음이 연상돼 마음이 짠해진다. 시댁에 가서 사랑받고 귀한 대접받길 바라는 마음에 엄마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보내던 우리나라 친정 엄마들의 공통된 애틋한 마음.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엄마의 마음이나, 아들을 먼 타국으로 보내며 취급설명서를 쓰는 내 마음이나 결국은 하나가 아닐까. 내 자식이 어디서든 모나지 않게 사랑받길 바라는 그 어쩔 수 없이 진심인 염원.
나는 오늘 호주에서 온 편지를 들고, 자식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를 맡긴 죄로 기꺼이 고개 숙이는 '자식 가진 죄인'이 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