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간관계 계산법
와리캉(割り勘)에 해당되는 단어로 더치페이(Dutch pay) 외에 순우리말 단어가 있나 찾아보니, 역시 없다.
확실히 따스한 정(情) 문화의 나라에서는 똑똑 쪼개거나 나누는 어휘는 예부터 그리 필요치 않았나 보다.
가끔 숏폼에 아주머니들이 식사하고 서로 밥값을 내려고 아우성치는 꽁트가 뜬다. 그 영상을 만든 사람의 의도는 아주머니들의 행동을 희화하기 위함이겠지만, 그 의도와는 달리 난 그 정겨움에 웃음과 함께 눈물이 난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서 더치페이가 점차로 일반화되었다고 하니, 지금 실제 우리나라의 계산법은 어떻게 변화되었을지 궁금하다.
내가 일본에 온 게 90년대 말이었으니, 더치페이에 익숙지 않던 내가 여기서 제일 당황했던 것이 이 와리캉문화였다. 학교에는 유학생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 주는 튜터라는 제도가 있어서 같은 전공의 여학생이 내 튜터가 되어 주었다.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렸던 그 친구와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난 당연히 내가 언니이고 날 도와주는 친구에게 밥값을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지갑을 열었더니 딱 잘라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내 호의를 무시당한 것 같아 무안했고, 친해지고 싶다는 애정 표현을 거부당한 것 같아 쓸쓸했다. 그 친구는 이미 학교에서 아르바이트 보수를 받고 있고, 앞으로 나와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데에도 이런 방식이 더 편할 것 같다고 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 정서로는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나도 그만큼의 거리를 두었고 그 친구와의 관계는 그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깔끔한 계산법이긴 하지만 여전히 난 아직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탕 한 개라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나눠서 1엔짜리 동전까지 꼼꼼히 챙겨 손해가 없도록 하는 정확함이 차갑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는 이 계산법을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일본의 와리캉은 "너와 나의 관계는 득실이 없어야만 유지될 관계야"라고 선을 긋는 느낌이 든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와리캉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친구와 만나서 영화를 볼 때, 영화 티켓을 친구가 샀다면 팝콘은 내가 산다거나, 저녁을 내가 산다면 카페에서 커피는 친구가 산다는 식의 계산법도 엄밀히 따지면 와리캉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와리캉에는 빈틈이 있고 엉성함이 있다. 그 빈틈으로 정(情)이 스며들어 엉성함조차 따스하게 품을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만 같다.
물론 이런 와리캉도 계산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우리 엄마처럼 누구에게든 뭐든지 더 해주고 싶고 베풀고 싶은 사람이 본다면....
솔직히 이제까지 내 인간관계는 일본식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한국식 와리캉이었던 것 같다.
경제적인 면보다는 마음을 내주는 것에 상당히 계산적이었다. 내가 마음을 열어도 열어 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은 경계를 했으며, 내가 힘들게 마음을 열었음에도 이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난 먼저 마음을 잘 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친구는 물론 연애에도 신중했다.
엄마는 가족이나 친구 없이 외롭다는 말 한마디 없이 버티는 나를 독하다고 했지만 난 인간관계에서 실망하거나 상처를 입기보다는 이방인으로서의 혼자가 편하고 좋았다.
이런 내가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인간관계에서 두려워했던 실망이나 상처, 아픔, 실패 등에 다소 오해가 있었음을.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겁을 냈을까....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을 때의 자유로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편안함,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애정, 호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누군가에게 거절당해도 웃을 수 있는 넉살이 이제는 생겨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는 이것을 아줌마의 주책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나는 비로소 알게 된 이 엉성한 자유가 참 반갑고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