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너 몇 살이니?"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던 말.....

by 혜준

20여 년이나 전의 일이다.

지도교수와 택시를 탈 일이 있었다. 기사님께 행선지를 말하는 지도교수의 반말에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에겐 생생하다. 내 눈에 기사님은 50대의 지도교수보다 족히 스무 살은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었다. 아니, 설령 젊은 기사님이었다 해도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존경하던 지도교수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내 버르장머리도…)

학계에서 존경받는 그 유명한 교수는 그날 이후로 나에게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존경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품격 없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곳 문화로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나에겐 여전히 껄끄럽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일본어도 경어체계가 우리나라와 같이 잘 발달된 언어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연령에 따른 상하(上下) 관계에서 연장자가 차지하는 우위(優位) 개념이 일본에는 없는 것 같다. 즉, 나이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힘을 발휘하는 것은 재력이나 학력, 집안 배경(신분), 직업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재력, 학력 등이 아무리 월등하더라도 일단은 연장자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내가 지금 한국의 변화를 몰라서 헛소리를 하고 있다면 가르쳐 주시길 바란다).

물론 한국 사회는 연장자에게도 단지 연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윗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한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인품을 기대한다.

그래서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그 비난도 만만치 않다.

윗사람은 덕(徳)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경(敬)으로 윗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연령 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런 윤리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은 연령보다는 재력, 학력, 직업, 집안 배경 등의 권력의 강약(強弱)에 따라 우위(優位)가 결정되는 문화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강약(強弱) 관계에는 덕(徳)도 경(敬)도 없다. 단지 우열(優劣)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강자(強者)가 그 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

흥미롭게도 일본 사회에서는 그런 행동이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일본의 진짜 부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재력이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한다.

이른바 "부티"를 감추는 게 미덕이며 기품 있는 태도로 여겨진다.


이런 경향은 일본의 "마마토모(ママ友)*" 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마토모는 아이를 통해 알게 된 엄마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주로 유치원이나 학교 행사에서 만나 연락처를 교환하고 정보를 나누며 친해지는 관계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엄마들 모임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난 한국에서 육아를 해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엄마들끼리 어느 정도 친해지면 먼저 나이부터 밝히고 언니인지 동생인지 관계를 정리 정돈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덕과 경을 바탕으로 친밀한 정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일단 이 관계로 우위가 정해지면 학벌이나 재력 같은 것들은 대체로 뒤로 물러난다.

물론 언니에게 덕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친해져도 서로의 개인정보는 쉽게 말하지 않는다.

나이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도 그것이 관계의 우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이는 힘의 원리에서는 별다른 효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모임에서 누군가가 은근히 학력이나 직업, 집안 배경에 대해서 묻는 분위기로 몰고 간다면, 그 사람은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소외되거나 그 모임자체가 서서히 소멸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그렇게 묻는 행위를 "마운트(マウント, mount)*"라고 해서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서, 자신의 우위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는 강자가 과시하지 않아도 인정받는 사회이며 오히려 과시하게 되면 그야말로 경멸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마마토모와 같은 모임은 처음부터 강약의 힘의 원리가 성립할 수 없도록 서로의 개인정보를 밝히지 않는 것이 기본 예의인 것이다(물론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고령출산으로 서른아홉, 마흔에 아이를 낳은 나는 어디를 가든 연장자였는데, 정신연령이 낮아 별문제는 없었지만 나보다 열 살 혹은 스무 살이나 어려 뽀송뽀송하고 깜찍한 마마토모가 맑은 눈으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따박따박 반말로 가르치려 들 때는 속으로 '얘, 너 몇 살이니?'하고 찌질한 꼰대 기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느라 애를 쓴다.

말해 봤자 어차피 본전도 못 찾을 테니까.

"나이가 몇 살이면? 그게 뭐?"

맑은 눈 마마토모의 단호한 반문에 깨갱, 꼬리를 내릴 내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니까.




*마마토모(ママ友):ママ (Mama)는 엄마, 友 (Tomo)는 친구라는 뜻으로 둘을 합치면 엄마 친구가 되는데, 비슷한 연령과 학년의 아이를 키우면서 모임에 참가하는 엄마들의 친목관계의 형태.


*마운트(マウント, mount):영어로 mount는 「올라가다」「타다」라는 의미로,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위(優位)인 것을 나타내는 언동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속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