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와 욧코라쇼 사이에서

두 나라의 감탄사 사이에서

by 혜준

수업 중에 내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발음하면 학생들이 "우와~"하고 감탄하는 일이 있다.

얘들아, 나 한국 사람!

외견으로는 동네 아주머니 같던 내가 갑자기 유창한 한국말을 하면 "네이티브" 한국인이라는 걸 새삼 인식하게 되나 보다. 이럴 땐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기억을 되찾는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다른 서양권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에 비해 수월한 것은, 외견으로는 구분이 가지 않아 차별과 편견의 경험이 월등히 적기 때문이리라. 입 다물고 있으면 엑스트라 1 정도의 존재감으로 이 사회에 스며들 수 있다.


만약 월드컵이나 올림픽, 혹은 지금 하고 있는 WBC와 같은 이벤트가 없다면, 특히 일본과 경쟁구도에 있을 때 외에 내가 뼈와 피가 끓고 있는 한국 사람인 것을 자각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어느새 한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점점 더 길어지고 있는 이곳에서의 시간은 내 아이덴티티를 자주 망각하게 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게 되면서 좀처럼 스케줄 맞추기가 어렵거나, 단순히 내가 게으른 이유로 매년 한국에 가지는 못한다. 가게 되면 엄마 집에서 그리운 엄마 밥을 먹으며 어리광을 부리곤 하는데, 며칠 지내는 동안 항상 엄마가 하는 말이 있다.

"일본 사람 다 됐네....."

엄마, 나 한국 사람!

빨래를 갤 때 무릎을 꿇고 무릎 위에서 빨래를 개는 모습을 보거나, 밥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라고 꼬박꼬박 말하거나 밥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먹는 걸 엄마가 곁눈으로 보면서 하는 말이다.

난 아무 의식 없이 하는 작은 행동들이 엄마의 눈에는 다른 나라의 문화로 보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자연스럽게 했던 행동 중에 이젠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행동이 있기도 하고, 예전에 안 하던 행동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행동 자체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아니라 각 문화의 차이일 뿐이라 나에게는 흥미롭다.

예를 들면 엄마나 언니는 물론이고 동성 친구나 지인 사이에서 친근함을 표현하는 팔짱이나 손을 잡는 행동은 잘 안 하게 된 것 같다. 서로의 거리가 가깝고 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일본에서는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차별적 언설이라 오해 마시길).

무릎을 세우거나 양반다리로 앉지 않게 된 것도 아마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진 탓이리라.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의상에 따른 습관 같기도 한데, 한복은 무릎을 세우거나 양반다리로 앉는 것이 치마의 라인이 예쁘게 살아난다. 반면 기모노는 정좌가 아니면 다리를 옆으로 포개는 식의 앉음새가 가장 단정하고 깔끔하다. 전통의상을 벗어던져도 그 앉음새가 유지되니 문화와 습관이라는 게 참 재미있기도 하다.

현관의 신발을 측면으로 가지런히 놓거나, 내가 손님으로 방문한 곳에서는 들어가기 전에 신발코(신발의 앞쪽)를 문쪽으로 향해 놓는 것도 한국에 있을 땐 하지 않던 행동들이다.

횡단보도를 나 혼자 건너가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뛰게 되는 행동도,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생각하면서 뛴다. 나 하나만을 위해 기다려 주고 있는 운전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일까, 고마운 마음일까.

지나친 배려인가 싶으면서도 발은 이미 달리고 있다.

내가 앉았다가 일어설 때 혼잣말로 내는 "욧코라쇼(よっこらしょ)*"는 일본 지인이 듣고 "니혼징?(일본사람이야?)"하고 킥킥거릴 정도다. 쩝.....


그렇다고 내가 엄마 말대로 일본 사람이 다 되었느냐... 하면, 아들의 한마디에 역시 너와 나는 한국 사람이구나... 하고 갑작스러운 국뽕(?)에 취하기도 한다.

아들은 문자는 고사하고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자주 하는 말은 대충 알아 들어도 아들의 입에서 한국어가 터져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단, 게임 센터(오락실) 갈 때 100엔만 더 달라고 애교 떨 때는 제법 정확한 발음으로 "엄마아~"는 가능).

어느 날 둘이서 밥을 먹다가 내가 실수로 물컵의 물을 식탁 위에 쏟고 말았는데 그때 나와 아들의 입에서 동시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 "아이고!"와 "아이고오~"였다.

말을 해 놓고 나서 눈을 똥그랗게 뜨던 아들과 그리운 감탄사 "아이고"에 행주를 가져올 생각도 잊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낄낄 웃었다.

한국인의 정서 저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아이고....."를 우리 아들은 언제 체득을 했을꼬....

아마도 내가 "욧코라쇼"를 내뱉는 횟수만큼이나, 집안 구석구석 "아이고"라는 한숨과 감탄사를 흩뿌리고 살았나 보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노후에는 어디에서 살 거냐고.

아이들의 자립 이후를 노후라고 한다면, 우리 부부에게 노후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닌다는 가정하에 아무리 빨라도 10년, 20년 후....?

어쩌면 우리 부부의 노후는 "욧코라쇼"와 "아이고"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거나, 혹은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저 먼 하늘나라에서 보낼 수도 있겠다.

어디에 있든, 내 입에서 어떤 추임새가 흘러나오든 난 여전히 이 경계의 삶을 사랑할 것 같다.




*욧코라쇼(よっこらしょ):감탄사로서 피곤한 신체를 움직이려고 할 때 내는 말. 특히 노인등이 일어 서거나 걷기 시작할 때 나오는 일종의 추임새 (출전 精選版日本国語大辞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