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라는 거울

가는 가[ka]인가, 가[ga]인가

by 혜준

도대체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가는 가? 가? 어느 쪽이 맞아요?"

뭐라고? 가는 가가가? 순간 경상도 농담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가씨 성이니?....

네가 어떻게 그런 고난도의 한국어 농담을 안단 말이냐.


어느 쪽이 맞냐고? 똑같은 양쪽을 두고 어느 쪽이 맞냐니....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네? 선생님이 지금 분명히 가를 [ka]라고 했다가 [ga]라고도 발음했단 말이에요. 어느 쪽이 맞냐고요."


당시 나는 석사를 막 마친 후였다.

그저 네이티브라는 것 하나만을 무기로 어찌어찌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기회를 얻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일본어 문법이라면 교직도 이수했고 내가 공부해 온 경험이 있으니, 가르칠 자신도 능력도 있었지만(뻔뻔스러움은 애교로) 한국어 교육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겨울 연가"로 불붙은 한국어 붐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교과서도 지금처럼 충실하지 못했던 시기였다(핑계를 용서하십시오. 현직 한국어 선생님들, 존경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가구"를 발음해 보시길 바란다. 자음 'ㄱ'의 발음이 다르다고 의식하면서 발음하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는지.... 로마자로 적어보면 "가구"는 사실 [kagu]에 가깝게 발음된다.

나는 그때까지 'ㄱ'의 발음이 앞에 문자가 있으면 소리가 부드러워지는 유성음화*가 일어나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엉터리 강사였다.

만약,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죽을 때까지 'ㄱ'의 발음이 문자가 하나인 것처럼 발음도 하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낫 놓고 기역 자는 알아도).

모국어라 너무 당연해서 인식조차 못한 것들을 외국어를 통해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비슷한 예가 일본어에서도 발견되는데, 일본어의 종성(終声)인 'ん'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어로 "귤"은 "みかん"인데, 일본 사람들은 이 단어의 발음을 [미칸]이라고도 하고 [미캄]이라고도 하고 [미캉]이라고도 한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발음을 하고 있는데도, 정작 본인들은 그 미세한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발음이 없는 게 아니라, 받침 ㄴ, ㅁ, ㅇ을 표기할 문자가 'ん' 밖에 없으므로 일본 사람들은 발음도 하나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쁘지도 않은 입술을 붙였다가 동그랗게 말았다가 혀를 윗니에 붙여가며 "삼, 상, 산"을 부르짖어도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さん, さん, さん"으로 밖에는 인지할 수 없다. 내가 'ㄱ'을 하나의 발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자가 인식의 틀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참 재미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할까, 귀여움이라고 할까, 한계라고 할까.

마치 자기 안에 수많은 감정이 있는데도 그걸 표현할 어휘가 없으면 그 감정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귀여운 어리석음에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난 가끔 연애에서 혹은 언어 학습을 통해서 그 구제(救済)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자신이 이제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느끼지 못하고 있던 감정이나 생각, 가치관 등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같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자신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왜?"라고 따지기보다, 우선 그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이해가 시작된다.

연애와 외국어 학습은 타자를 수용함으로써, 내 안의 미지의 것들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능하게 해 준다.


어쩌면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만 조금씩 자신을 알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타자라는 거울 속에 비친 낯선 내 얼굴을 응시하며, 그렇게 말이다.




*유성음화:목청이 떨리지 않는 자음(ㄱ[k],ㄷ[t],ㅂ[p],ㅈ[ch])이 모음 사이에 끼어 부드러운 소리([g],[d],[b],[j]로 변하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