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이라는 이름의 節目,그리고 門出

마디를 지나, 다시 문 앞에 서다

by 혜준

오늘은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졸업식이라고 해도 중고등학교 6년간 같은 학교라서 선생님들과도 친구들과도 헤어지는 일 없이 그대로 같은 고등학교로 진급을 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들도 졸업식이라기보다는 종업식을 하는 기분으로 참석했다.

그래도 한 명 한 명 씩씩하게 단상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께 졸업증서를 받는 아들들을 보는 감회는 새로웠다.

입학할 때는 손등을 가릴 정도로 길었던 교복의 소매가 깡충 짧아지고, 바짓단을 전부 내려도 마이클 잭슨 스타일이 된 짧아진 바지를 보면 삼 년이란 시간은 제법 긴 것도 같다.

또래보다 늦돼서 사춘기도 아직인 것 같은 아들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니 제법 듬직한 모습이 장가를 가도 될 듯하다(누굴 고생시킬지는 모르겠으나....).


한 시간 만에 끝난 졸업식 후에는 사은회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부모가 참석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눈물도 꽃다발도 사진도 없이 맹숭맹숭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흔들흔들 리듬에 몸을 맡기자니 예전의 내 졸업식이 떠올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아침 일찍부터 교문 밖에서 프리지어 향기를 풍기는 꽃다발 파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그날만은 지긋지긋하던 학교가, 교실이, 운동장이 왜 그리 정겹게만 느껴지고,

거리를 두던 선생님들도, 친하지도 않던 친구들까지도 애틋하게 느껴졌는지....

그러나 그날 이후, 난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다시 가 본 적이 없으며,

같이 눈물을 찔끔거리던 당시의 옛 친구와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나에게 있어 졸업은 단지 헤어짐, 다시 돌아가지 못할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이라도 모교에 가 보고 싶다거나 옛 친구를 다시 찾아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없다.

오히려 졸업은 헤어지는 슬픔보다는 새로운 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더 컸다.

아들의 중학교 졸업도 졸업증서와 엉망인 성적표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고등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삼 년을 어떻게 보내려나 하는 걱정과 기대가 더 크다.


일본에서는 입학과 졸업, 취업이나 결혼, 은퇴 등 인생의 큰 사건들을 "인생의 節目(ふしめ [hushime])"라고도 한다.

節目는 대나무의 마디를 가리키는 말로, 이 節目가 있기 때문에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가 강한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다고 한다. 節目는 성장이 잠시 멈추는 지점으로 보여도, 사실은 다음 단계로 더 뻗어 나가기 위한 에너지를 모아 구조를 튼튼하게 다지는 곳이다.

우리들이 과거와 매듭짓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거나, 잠시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날을 설계하거나, 큰 변화나 시련을 겪으면서 더 단단해지거나 유연해지기 때문에 졸업이나 은퇴, 결혼을 인생의 節目라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節目가 생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출발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일본어로는 門出(かどで [kadode] 떠남, 출발, 시작)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인생의 큰 "節目(ふしめ)"를 맞이하여, 새로운 "門出(かどで)"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節目가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마디를 만드는 내면적인 성숙과 매듭이라면, 門出는 그 마디를 딛고 새롭게 문 밖으로 나가는 외향적인 행동과 시작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아이들과 지내며 많은 節目가 있었고 또 門出를 응원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節目와 門出가 우리 가족을 기다려주기를 기도한다.

슬픈 일이든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기쁜 일이든 이렇게 진심으로 서로의 성장과 위로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감사한 오늘이다.


나에게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門出가 남아 있을까?

나이 들어가는 편안함이 곧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긴장과 불안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과감히 불편함을 택하고 싶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을 나의 門出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나의 節目도 점점 많아진다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