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飛んで([tonde] 날아가고) 納豆 [natto]만 남았네
큰소리로 떠벌릴 일은 아니지만 나는 술이 세다.
그게 자랑이냐고 하던 엄마의 눈빛이 떠오른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마시고 나서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주사를 부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얼마나 많이 마시는가를 측정해 본 적은 없지만 마시다가 의식을 잃는다든지 잠이 든다든지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맛도 잘 모른다.
일을 마치고 피로와 더위에 지쳐 갈증이 날 때 마시는 첫 모금의 맥주의 시원한 맛은 알지만....
그래서 혼자서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술을 마실 때는 사람들과 모여 있을 때뿐이다.
사람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술잔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기뻐서 즐거워서 신이 나서가 아니다.
그 반대이다.
할 말이 없어서 뻘쭘해서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거나, 흥미 없는 이야기에 성의 없이 장단을 맞추기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면 난 입을 다물고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잔을 기울인다.
어제는 새 학기 준비를 위한 회의가 있었고, 그 후에 정년퇴임을 하시는 선생님의 송별회가 있었다.
퇴임을 하시는 선생님께는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졌고, 지금까지는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회의는 참석했어도 회식에는 살짝 빠졌기 때문에 나로서는 큰 맘을 먹고 출석을 하게 되었다.
변화가 느린 일본의 대학도 요 근래 외국어 교육에 대한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으나, K-컬처 덕분에 영어 다음에는 한국어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새로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세 분이나 늘어서, 회의가 끝나 회식 장소에 가 보니 커다란 테이블에 10명이 함께 앉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셋 혹은 넷으로 그룹이 나뉘어 각자 이야기 꽃을 피우신다.
중간에 앉게 된 나는 안 그래도 낯가림이 심한데, 이 그룹에서도 호호호, 저 그룹에서도 하하하 하다가 보니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나잇값도 못하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달래 주는 건 내 곁에 조용히 함께 앉아 있는 술잔이다.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모금 마시다 비워진 잔에는 또 어느새 새로운 술이 가득 채워져 있다.
또 한 모금, 또 한 모금....
돌아갈 시간이 되어 퇴직하시는 선생님께 준비한 작은 선물을 살짝 건네고, 다른 선생님들과는 이번 학기도 파이팅 하자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뒤돌아서 집에 오는 길에 딸에게서 "낫토 사 가지고 와"하는 메시지를 확인한 기억은 난다.
집에 와서 깨끗이 샤워도 하고 이도 닦고 파자마로 잘 갈아입고 조용히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딸아이에게 낫토를 못 사 와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딸이 내 가방에서 낫토를 꺼내 들고 와서 "엄마, 낫토 고마워"한다.
엥? 내가 낫토를 샀다고? 언제? 어디서? 기억이 전혀 없는데?
어제 술자리를 파하고 나서 편의점에서 산 모양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갑을 열어 보니, 넣어 두었던 세금고지서 대신에 도장 찍힌 영수증만이 달랑 남아 있지 않은가.
낫토를 사면서 세금도 냈나 보다.
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편의점 매대를 서성이고, 현금을 내밀어 계산을 마쳤을 그 '투명 인간' 같은 시간을 떠올리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제껏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필름이 끊기다니...
기억이 날아가다니(記憶が [kiokuga]飛ぶ [tobu])...
회식 장소에서 우리 집까지는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고, 난 분명히 집으로 향하는 아파트 복도를 걸었던 기억도 있고 현관문을 연 기억도 있다.
하지만, 딸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부터 어떻게 편의점에 갔는지, 거기서의 내 동선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잘 드는 가위로 그 시간만을 싹둑 잘라내 버린 느낌. 아무리 생각해 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거스름돈을 받아 지폐는 지갑에 동전은 동전지갑에 나눠서 넣기까지 한 그 좀비와 같은 무서운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영혼이 날아간 몸뚱이만의 나를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던 것만 같다.
과연 편의점에서의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편의점의 CCTV에는 내가 어떻게 찍혀 있을까?
편의점 점원이 영수증에 도장을 찍는 동안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서 있었을까?
몸을 비틀비틀 히죽히죽거리며 영수증과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을지, 낫토를 내밀면서 "아름다운 밤이에요" 하면서 헛소리는 하지 않았을지......
술 먹고 온갖 행패를 부린 사람이 술이 깨고 나서 기억이 안 난다며 백배 사죄하는 사연을 들으면 전부 사기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게 사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알코올이 자신의 의지와 의식을 휘발시킬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다만, 내가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건전한 시민으로서 납부의 의무에 충실하고 상냥한 엄마로서 딸의 요구에 부응한 것에 대해서는 기특하긴 하다.
아침부터 여우에 홀린 것 같은 이 묘한 상황이, 속이 울렁울렁하는 숙취(二日酔い [hutsukayoi])와 더불어 영 찝찝하다.
내가 나한테 진 것 같고, 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콤콤한 냄새를 풍기면서 낫토를 맛나게 먹고 있는 딸내미의 옆에서, 인상을 구기며 앉아 나이와 체력을 생각해 앞으로 술보다는 능수능란한 화술을 좀 익혀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