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노동을 너무 지엽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가 노동을 하는 이유를 단순하게 유용함을 위해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일을 하는가? 아마 대부분 당연한 대답을 할 것이다. “돈 벌려고.” 결국 일을 함=돈을 벎=유용함이라는 간단한 도식이 생긴다. 그럼 과연 이것이 항상 옳은지를 생각해 보겠다. 그러나 우리는 ‘유용함’이라는 모호한 지점을 자세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당신이 땀 흘리며 한 일이 누군가에겐 혹은 다른 상황에서는 무용함이 될 것이다.
일을 하고 돈을 받는다. 돈으로 삶에 필요한 것을 충당한다. 돈은 지금 사회에서 가장 유용한 것으로 대변 가능한 것이고 돈을 버는 행위는 당연히 유용함 위한 행위이다. 그럼 이걸 선사 시대쯤으로 이동해서 생각해 보자. 당신이 일을 한다. 사냥, 채집, 토기 제작 등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그 대가로 누군가가 당신에게 국제통화인 달러를 쥐여준다. 하루 일하고 300달러를 받은 당신, 국제통화를 받았지만 다른 당신과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모른다. 당신은 하루치 노동을 무용함으로 바꿨다. 이것은 당신이 선사 시대의 사람이기에 생긴 무용함이고, 당신 외의 사람들이 달러의 가치를 모르기에 생긴 문제이다. 이 상황이 앞서 말한 일=돈=유용함 이란 가치가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른 무용함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경우이다. 그럼 그 선사 시대의 당신이 한 노동이 과연 아무런 유용함을 만들지 못했는가?
이 부분에서 우린 노동을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너무 좁은 수준에서 노동을 판단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 속에 생존해 있는 것만으로도 유용함을 창조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가? 이런 사고의 확장은 돼지를 이용하면 수월하게 될 것이다. 농장에 돼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먹고, 자고, 싸고 살아 있음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근육과 지방을 늘린다. 그것이 돼지가 하는 일이다. 그럼 그걸 하는 인간은 우린 뭐라고 부르는가. 백수, 캥거루족 등으로 칭한다. 아무런 유용함도 만들지 않는 존재로 취급한다. 결국 우리가 일 혹은 노동쯤으로 취급하지 않는 일이 상황과 대상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즉 유용함은 상황에 따라 입는 이에 따라 변하는 옷가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노동을 자로 잰 듯 정확한 기준으로 구분하는 근거를 누가 제시해 주었냔 말이다. 선사 시대로 이동한 당신이 하루치 노동을 300달러가 아닌 하루 동안 무리에서의 생존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의 유용한 가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과한 비약이 아니란 것을 미래를 통해 생각해 보겠다.
인공지능이 더 발전한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이미 일론 머스크 등의 사람들이 말했듯, 인간이 일하지 않는 세상이 찾아온 그때는 지금 돼지의 일과 미래 우리의 일이 겹쳐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이 말은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닐 것이다. 그때의 우린 인공지능이란 농장주를 만들고 우린 지금 가축이라 부르는 삶을 사는 존재로 변화하지 않을까? 그럼 우린 가축으로 종을 유지하며 적당한 번식을 하고 적당히 비육하는 것이 우리의 노동이 된 사회다. 이쯤에서 초반에 말한 선사 시대에 떨어진 300달러를 다시 떠올려 보자. 노동하지 않는 미래 시대의 인류에게도 계좌의 300달러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완벽히 없지는 않더라도 선사 시대에서 불쏘시개쯤으로 쓰일 지전(紙錢)과 비슷한 가치까지 추락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지금의 아무런 유용성이 없는 백수의 삶이 유용한 삶으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우린 유용함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의 가능한, 그렇게 인지하기로 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각자의 상황에 따라 유용하다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