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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ug 03. 2022

실연도, 천국의 문도

내 영역 밖의 일이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실연을, 어떻게 설명?】


사운드 클라우드(Sound Cloud)라는 것이 있다. 전 세계의 음악인 중에서 아마추어나 프로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신곡 프리뷰를 올리는 일종의 음악 유통 플랫폼이다. 예를 들면 요즘 우리들이 많이들 보는 유튜브와 비슷한 거다. 그러나 노래만 가능하다는 게 유튜브와는 다르다.


오래전 아들이 고교시절  그곳에 랩송 몇 곡을 쓰고 부른 노래를 올렸다. 지금까지 아들의 노래를 듣고 간 사람들이 수 만 명이다. 우리 아니, 내 정서로는 그 노래들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나 같은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는 걸 거다.


하여튼 그 후 몇 달이 지났어도 아들은 노래를 몇 곡 만들어 녹음까지 끝내 놓고도,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리지 않고 있었다. 슬쩍 스쳐 들은 말로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란다. 그때 한참 전에 아들이 내게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빠, 나 실연(失戀) 당하고 싶어!” 이 뜬금없는 말의 배경은, 실연 같은 것을 당해 보지 않아서 노래를 만들 때 진정한 감정이 살아나지 않는다나 어쨌다나...


평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게 뭐든 물어보곤 하던 아들이다. (묻지 않으면 내가 먼저 말해주기도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시사  등...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장 쉬운 표현으로 편하게 이야기해주기를 노력한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 대학생이 아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심지어 얼마 전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온 아들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내가 아는 게 옳다고 우기자, 아들의 한마디가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아빠! 내 전공이 뭔지 잊었우?" -맞다. 아들은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있다. 그 앞에서 주름을 잡았으니...-


어쨌든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은 그때도 은근히 실연의 단어적 의미가 아닌, 감정의 상태(?)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언제든 뭘 물어봐도 막힘없이, 쉽게,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자부하던 나는 말이 막혔다. (... 실연을 어떻게 설명하노...)


내가 아무리 말과 글에 능하다고 해도(턱도 없는 소리지만), 실연은 말이나 글로 설명될 성질이 것이 아님은 안다. 실연에는 치유할 약이 없다. 글을 쓰거나 시를 읽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혹은 뭔가에 몰두하는 것으로는 구급약 수준이다. 소주와 세월이 그나마 도움이 될까?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겨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실연은 겪어 봐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실연을 당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내가 선택할 여지는 없다. 세상에는 실연처럼 말이나 글로 설명할 없는 게 있다. 실연은 당해봐야 안다,라고.



                                      【천국의 문틈 사이에서 본 것을, 어떻게 설명?】


13세기 유럽 중세의 문을 연 사람이,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다. 신학자, 철학자, 교수, 수사신부... 그를 한 직업인(?)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사장 신학자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는, 교회학자 33인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장차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강권에서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는 그곳에서 나와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된다.


백작의 아들인 그는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는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마치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의 삶을 살고자 했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 후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대학자 알베르투스의 애제자가 된다. 그 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을 심도 있게 배우고 연구한다. 그는 말이 어눌하고 몸집이 컸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말없는 황소’였다.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가진 그는 그 후 유럽 최고의 대학이라는 파리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일곱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마흔아홉이라는 나이에서부터 선종할 때까지 유럽의 아니 전 인류의 신학과 철학 등에 남긴 그의 업적은 (<신학대전> 등 수많은 저서와 강독 등),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을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스 축일 미사 때, 그는 어떤 충격을 받은 듯 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당황케 했다. 그날 이후 임종하기까지 3개월 동안 그는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평생 잠시도 저작 활동을 멈추지 않던 그가 모든 일에서 손을 뗀 것이다.


그가 그날 미사 중에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비서의 말에 의하면 그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방금 내가 미사 중에 본 것에 비하면, 내가 평생 말하고 써 온 것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




소피스트 이긴 했지만 그리스 철학자 고르기아스는 이런 말을 했다. “진리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고 해도 전할 수 없다. 전할 수 있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위대한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이 본 ‘천국의 문틈 사이’에서 본 것을(나는 그가 그것을 봤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았는지 모른다.


만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면? 미련한 범부인 내가 겪은 ‘실연’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는 우리가 전할 수 없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실연도 천국의 문도... 내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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