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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2. 2022

사랑하고, 사랑받고

백석과 자야

며칠 전, 술 한 잔 마시고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핸드폰 메일 수신음 탓에 잠이 깼다. 아직 밤 10시가 되지 않았다. 오랜 벗이, 내가 한참을 잊고 살던 시인의 시를 보내왔다. 나는 그 시를 슬픈 눈으로 훑으며 늦은 밤까지 뒤척였다.     


           [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눈 감을 밖에  ]     


30여 년 전에 처음 읽고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아파(?)했던 정지용 시인의 시 <호수> 전문(全文)이다. 월북시인이라 당시엔 제도권에서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진 그를 몰랐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된 이가 그다. -그의 시 <향수>는 그 뒤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에 의해 불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 서른 한 글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 어느 장편소설에 못지않은 사랑, 이별, 그리움, 체념. 그리고 순정 또 그 보다 더 한 사랑... 그 수많은 사연들이 이 짧은 시 안에 녹아 있었다. 지금 이 시를 읽고 가슴 아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시쳇말로 <살아있네>라고 불려도 좋을 사람이다.     


요즘 난, 이 시를 읽고 그 옛날처럼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젊은 날의 그 격정이 죽었는지 메말랐는지... 어쨌든 그 뒤 내가 만난 이가 백석이라는 또 다른 월북 -원래 평북 정주 사람이라 월북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시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京城). 일본 유학을 다녀온 스무여섯의 영어교사였던 백석과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의 스무둘의 기생이었던 김영한의 사랑은 불같이 뜨거웠지만, 백석 집안의 반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백석은 김영한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했지만 영한은 따르지 않았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끝난 후, 백석이 만주에서 고향 정주로 귀향을 하게 되면서 이 두 사람은 영영 이별을 하게 된다.     


남한에 홀로 남은 영한은 요정을 운영하면서 큰돈을 번다. 그녀는 그 와중에서도 매년 백석의 생일날이 되면 하루 종일 곡기를 끊고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다고 한다. 그를 따라가지 못한 회한 때문이었을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든셋인, 1999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영한은 7천여 평, 당시 시가 1천여 억 원의 부지의 요정 <대연각>을 법정스님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송광사에 시주한다. 서울 성북구에 소재한 이 절은 지금 길상사라 불린다.               

누가 물었다. 그 많은 것을 시주하고 아깝지 않냐? 고 그러자 자야(子夜. 백석이 김영한을 이렇게 불렀다)가 말한다.     


                   “1천억 도 그 사람 詩 한 줄만도 못해...”  물론 백석의 시를 일컬음이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全文                                 (시어 중 사투리 출출이는 뱁새, 마가리는 오막살이, 고조곤히라는 고요히라는 뜻)     


이 시의 ‘나타샤’는 이상화의 마돈나처럼 우리 문학의 베아트리체다. 나타샤… 그녀가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이라고들 한다. 설사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정지용의 처절한 <그리움>, 김영한의 지고지순한 <순정>, 백석이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푹푹’ 내린다고 노래한, 그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 아니 나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애절케 하는.     


지금 흰 눈은 안 내리고, 흰 당나귀도 없지만, 나는 이 한 밤중에 흰색 소주를 마시며 백석의 시를 다시 찬찬히 읊조려 본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시인의 호기 찬 말을 아련해한다. 나는 독한 흰 소주를 스스로에게 가득 부으며 살며시 속삭여 본다.         


                  “인생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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