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이 달 마지막 날... 우중이다
by 장영철 Francis Aug 31. 2022
하나.
보문호수의 수량이 다른 해와 달리 적어, 보는 이들을 답답하게 한다. 어제 아무 생각 없이 세차를 하고 나니 오후에 늦은 장맛비가 쏟아졌다. 순간 그는 황당했지만 이 빗물이 메말라 있는 보문호수를 다소나마 채워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까짓 거 세차쯤이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참 오랜만에 조우하는 비다. 최근 한 달 가까이 그는 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분명 비는 내렸건만 그의 기억 속에는 비 한 방울이 떠오르지 않았다. 뉴스를 통해 서울 인근의 폭우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오늘 새벽 불어오는 바람에게서 그는 어제와는 다른 숨 쉴 틈을 스치듯 보았다. 이렇게 날이 서늘해(?) 지는 것은 아마 ‘성탄절이 다가오기 때문일 거다’라는 우습지도 않은 시중 농담을 스스로에게 해 본다.
그때 핸드폰에서 다른 메시지 알림 소리와 함께 낯선 문자가 눈에 띄었다. 몇 주 전에 날아온 <8월에 눈 내리는 경주 예술의 전당> 공연 안내문이었다. 이 더운 날 시원하고 하얀 눈을 상상해 보자는 의도로 공연 소식을 알려온 것이리라. 그때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영화 제목이기도 하고 또 다른 내용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할 때마다 그는 까닭 모를 먹먹함에 빠진다. 왜 이럴까? 자문해 보지만 딱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값싼 센티멘탈 때문인가?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는 이 제목의 소설은 읽지 못했지만 영화는 본 적이 있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한석규 役)이 8월의 어느 날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는다. 감독은 이 장면을 롱 테이크로 처리했다. 그는 그 그림을 지루해하기보다는 까닭 모를 슬픔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한부 환자에 대한 자질구레하고 질척한 감정들을 걷어내고 미니멀리즘 전략을 취하여 굉장히 신선한 한국형 멜로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 그 영화의 그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우중이다. 그는 상념에 빠졌다. 지금 어느 누군가에게는 올 12월이 멀 수도 있다. 아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과 허무함에 토해내는 낯익지만 다가갈 수 없는 8월의 크리스마스.
최근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선종을 여럿 지켜봐야만 했다. 아는 사람이 늙어 쇠약해지면서 자연사하는 것도 안타까운데 일인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그들의 장례식장에서의 그의 한숨은 깊었다.
불편한 진실은 (이별이든 늙음 혹은 죽음이든) 언제나 실존한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들을 거부하고 싶더라도 그건 단지 우리 스스로의 바람일 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의 실존은 우리와 멀리 있지 않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던 어제의 그 더위도, 사랑하는 이와의 애틋한 맘 나눔도, 나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도, 아무리 스스로가 터부시하고 배제한다고 해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부활을 믿는다고 매 미사 때마다 고백하는 값싼 그의 입은 이미 상투화된 지 오래다. 그래도 이 여름을 보내며 곧 다가 올 가을의 문턱을 앞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잘 죽을 준비를 하고 싶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오늘 여기의 삶을 잘 살겠다는 것이다. 죽음을 올바로 대면하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여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과 동일한 말일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이, 단순히 죽음 이후 혹은 역사의 종말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는 그다.
현재의 삶 속에서 신의 뒤를 따라 믿음과 희망 가운데 신의 나라를 세우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영생(永生)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여름의 끝자락이다.
추신.
그의 지인이 투병 중이다. 그를 못 본 지 벌써 여러 달 되었다. 치료 차 서울을 오르내리고 있다는 말을 풍문으로 듣고 있지만 아직 통화나 문자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겨울 진목정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따뜻한 밥 한 끼 서로 나주지 못했던 일이 자꾸 가슴에 걸린다. 오늘도 그에게 전화를 해도 문자를 날려도 답이 없다. 무슨 이유로 연락이 되지 않는지 짐작은 가지만 아무것도 그가 할 수 없음에 가슴만 서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