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여러 파편들과 함께 다가온다
잠이 깼다. 주일 새벽이다. 몸을 뒤척이는데 오른손 주먹이 화끈거린다. 스탠드를 켜고 보니 피투성이다. 퉁퉁 부어 손아귀가 쥐어지지 않는다. 어제 지인들과 술 한잔. 그 늦은 밤 황성공원을 가로질러 귀가하면서 위협적인 유령의 경고(menace of a ghostly warning) 소리에 주먹을 날린 탓이다.
보통 책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좌우로 젖기도 한다.
삶도 그렇다. 살면서 어느 부분은 고개를 끄덕거림으로 인정하지만 어떤 상황은 심한 도리질로 인정하고 싶지 않고, 받아 드리기 어려운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저승 앞에 흐르고 있다는 망각의 강. 저승으로 들어가려면 이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면서 물을 마시는 순간 이승에서의 모든 시름과 기억, 추억이 모두 잊힌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테(Lethe)다. 지금 내겐 그 강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강물 대신 <레테 주>라는 게 있다.
커다란 컵에 맥주를 가득 붓고 적당히 소주를 탄, 내가 이름 지은 술이다.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안주 없이 몇 잔을 연이어 단숨에 마시는 거다. 남들은 폭탄주라고 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기억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망각도 살아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울 수 없기에... 게다가 작은 것들에도 예민해하는 나는, 요즘 자주 레테 주를 만들어 마시며 견딘다.
견디기 어려운 힘든 기억의 형태는 다양하다. 수 십 가지의 도형으로 그 꼴을 갖추고 있다.
어떤 것은 삼각형으로 날카로운 세 개의 뾰족한 상태로 온 가슴속을 굴러다니며 쿡쿡 찌르고 할퀸다. 어떤 기억 때문에 가슴 구석구석 특히 명치끝이 아리면, 그건 삼각형 기억이다.
또 어떤 것은 사각형으로 삼각형보다는 좀 낫은 편이라지만 네 모서리로부터 전해오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어느 기억으로부터 짓눌린다고 생각된다면,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했다면, 그건 사각형 기억이다.
며칠 전 내 가슴속을 열어봤다. 어떤 형태의 기억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안에는 참 다양한 도형의 수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맞다. 어떤 기억이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인출되지 않고 있을 뿐.
삼각형에서 사, 오, 육, 칠, 팔 구각형까지 심지어 별 형태까지 있어 황망하게 가슴을 닫았다.
나이 들어오면서 가슴에 담은 많은 기억들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기억들은 생채기를 입고 있었다.
그 밤 귀가 길. <어떤 기억>이 위협적인 유령이 되어 내게 소리쳤다. 날 희롱하고 조소하고 능멸하며 이렇게 경고했다. "넌 결코 망각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도 매일 레테 주를 마셔도, 가슴속 그 많은 기억들을 모조리 다 끄집어내어 불태워도... 결코!"
숲 길을 큰 보폭으로 걸으며, 도리질 치며 부정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으름장도 부려 봤지만 유령은 요지부동이었다. 희롱과 조소와 능멸만 더할 뿐. 그때 화가 날대로 난 내가, 있는 힘을 다해 그 유령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유령은......... 오래된 소나무였다.
오른 주먹 상처로 며칠 수영을 갈 수 없게 되었다. 습관처럼 눈 뜬 새벽. 오랫동안 어둔 천장을 보며 숨을 고른다.
눈을 감는다.
수를 세린다.
하나, 둘... 아흔아홉, 백... 사백사십구... 다시. 하나, 둘... 아흔아홉, 백... 사백사십구... 다시... 하나, 둘...
시간이 지나면 거친 돌들이 부드럽게 마모되듯, 힘든 이 다양한 기억들도 둥글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 어떤 지난한 슬픔과 아픔, 고통도 언젠간 망각이라는 힘 덕분에 잊히듯이.
위협적인 유령의 경고 소리도 함께 말이다.
유령 같은 일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