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음식 식당에서
심한 바람이 창밖 담벼락 옆 키 큰 접시꽃들을 희롱하듯 흔드는 오후, 나는 사찰 전문 음식점에 앉아 있다. 칸막이 옆 테이블을 차지한 비구니 스님들의 사각거리는 승복, 잔잔한 웃음, 요란하지 않은 말소리가 정겹다.
여기는 경주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바루라는 식당이다. 눈과 맛에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 끊이지 않고 상위에 자리한다. 화학조미료와 오신채(마늘ㆍ파ㆍ달래ㆍ부추ㆍ흥거)와 육류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식탐을 유도하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하지만 평소 매운 음식과 커피와 술을 가까이하는 나에게 이 음식들은 편치 않다.
그때 음식을 맛나게 먹고 있는, 이 자리를 마련한 마주 앉은 이가 투덜거린다. 얼마 전 다녀온 태국에도 절이 많은데 왜 이런 음식들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음식에 흥미를 잃고 있던 나는, 그 의문에 내 얄팍한 지식을 들춘다. 불교=사찰음식의 공식은 정답이 아니다. 불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는데, 사찰음식은 대승불교에서 발달한다. 그 이유는 공양 방식 때문이다. 소승불교에서는 탁발한 음식으로 공양을 해결하다 보니 사찰음식이 들어 설 틈이 없는 반면, 대승불교는 사찰에서 스스로 자급하다가 자연스럽게 사찰 음식이 발달하게 된다. 알다시피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소승불교고 한국, 중국, 일본 등이 대승불교 국가다. 그래서 동남아에서 사찰음식을 보기 어려운 거다.
음식엔 눈길을 주지 않고 엉뚱한 소리만 주절거리는 내 말에, 마주 앉은 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음식을 사주게 되어 조금 게면 적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가 대하니 잘 됐다 싶은 모양이다. 내게 특별히 즐기는 음식을 묻는다. 그때 불현듯 그 음식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다.
홍탁...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주 앉은 이에게,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허리를 고추 세워 말을 계속 잇는다. 삼합(삭힌 홍어, 돈 수육, 묵은 김치)에 탁주(막걸리)를 말하는 거다. 홍어의 주산지는 흑산도다. 그곳에서는 잡은 홍어를 회로 많이 먹지만 내륙으로 들어 간 나주 등에선 삭힌 홍어가 발달한다. 마치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토착화된 것처럼. 내 말에 흥미가 당겼는지 마주 앉은 이가 또 묻는다.
왜 굳이 삼합인가? 사합, 오합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 앎의 밑천이 남은 내가 답한다.
삼합은 명리학에서 최상의 조합을 이룬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홍어와 수육과 김치는 마치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듯 삼라만상의 조화를 이룬 맛을 내는 것이다.
가까운 울산에서 삼합은 언양 육회에 개불 그리고 배를 곁들여 울산 삼합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삼(3)은 균형을 이루면서 변화와 통일을 포함한 완벽한 조화(Harmony)를 이룬다. 개인적으로 그 조화에 화룡점정은 탁주 한 사발이다. 사찰 음식을 앞에 두고 대화가 홍탁으로 이어지는 난해한 자리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점심을 끝내고 귀사 길에, 홍어에 대한 기억이 파편이 되어 온 몸에 박힌다. 언젠가 다시 삼합 앞에 앉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 질 무렵이어야 한다. 내 말의 톤은 낮을 거다. 내 이야기를 뒤에서 누군가가 듣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때도 반듯이 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넘어가야 한다.
바람만 불어도 고개를 돌리는 요즘, 한동안 잊고 살던 음식 때문에 다 지우지 못한 아픈 편린들이 되살아나 꽂힌다.
<이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냥 찍기만 했다. 내가 마셔 버리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