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글
추석이 지난 오늘... 글은...
by 장영철 Francis Sep 16. 2022
가끔 집에서 맥주라도 마실 때면 땅콩 생각이 나곤 했다. 땅콩은 고소해야 제 맛인데, 흔하고 가격 싼 중국산은 맛이 영 아니었다. 그래서 마트에 들를 때마다 국내산을 사려했지만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요즘 내게 여의치 않을 게 땅콩만은 아니지만...
그러던 지난주 황성 5일장을 우연히 지나다, 국내산 햇 땅콩을 발견했다. 방금 전 뻥튀기 기계에서 구운 거라고 했다. 몇 개 집어 주기에 먹어보니 고소했다. 5천 원. 맛에 흐뭇해하자 햇 군밤도 건넨다. 땅콩 덕에 생각지도 않은 군밤도 샀다. 5천 원. 두가지, 만 원어치 먹거리에 흡족해하며 귀가해 땅콩과 군밤을 까서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먹었다. 목이 살짝 막혀 안주로 맥주 한잔을 했다. (이렇게 간혹 안주가 맥주일 때도 간혹 있다) 잠들 기 전 머리맡 메모지에 편지 글을 끼적끼적거리다가 초 가을 먹거리로 살짝 취기가 돌자 눈을 감았다. 그날 저녁은 그것들로 한 끼를 해결했고 잠들었다.
그렇게 우연히 조우한 땅콩과 밤 때문에 글은 시작됐다.
깼다. 눈 뜨지 말자. 이렇게 감고 있자. 몇 시인지 알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은 새벽이라는 것일 뿐. 어제 잠들기 전 창문을 한 뼘 정도 열어 놓았다. 소리를 켜 놓고 잠든 것이다. 그 사이로 소리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바람 소리다. 빗소리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다. 왜 나는, 바람을 바람소리라 하고. 비는 빗소리라 하면서, 귀뚜라미는 우는 소리라고 할까. 웃는 소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대화 소리라고 하면 어떨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고 하니 어색하다.
이른 가을 탓 일까. 내 일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 때문일까. 모를 일이다. 아직도 눈 감은 채, 생각의 사다리를 앞에 서있다. 오를까 말까. 눈 뜰까 말까. 그래도 마냥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다. 일어서자.
그러나 여전히 글은 끝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추석 전 아내와 제수용 음식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갔다. 명절 앞이라 그런지 마트는 카트를 밀고 다니기가 버거울 정도로 혼잡했다. 냉장 코너에서 깐 밤 생률을 만났지만 눈길을 주지 않고, 대신 껍질 두툼한 알밤을 찾아 카트에 담았다. 그 선택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밤에 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이다.
오래된 그 아련한 어느 날. 부엌에선 어머니가 전 날부터 준비한 음식들을 접시에 담고 계셨다. 추석 상 앞에서 아버지는 한복 차림으로 생밤을 치고 계셨다. 그 옆에서 깎은 밤톨머리를 한 사내아이의 표정은 궁금함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과도를 든 손은, 밤을 가로로 칼집을 내고 껍질을 벗긴다. 밤의 납작한 부분의 속껍질을 치고, 돌려 볼록한 부분도 깎은 후, 각도를 맞춘다. 예쁘다. 아버지의 칼로 인해 밤은, 짙은 갈색에서 옅은 살색으로 그리고 뾰한 민낯을 내민다.
아직도 글은 미완인 채로 남아 있다.
밤톨머리 아이가 이제는 밤의 속껍질을 그냥 속껍질이라 하지 않고 보늬 혹은 율피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안만큼 세월이 흘렀다. 밤나무는 땅 속에 밤톨이 씨 밤인 채로 달려 있다가 밤의 열매가 열리고 난 후에 씨 밤이 썩는다, 라는 정도를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그래서 밤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과 자기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라는 의미를 자식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물들었다.
며칠 전 추석 날 아침.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접시에 음식이 담기고 있다. 상 앞에서 이제는 히긋히긋 해진 밤톨머리가, 자신의 아버지가 매 해 그랬던 것처럼 밤을 치고 있다. 그러다 말고 밤을 치던 손을 멈추고 돌아앉는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거린다. 청승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년에도 이렇게 밤을 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말한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날이 갈수록, 꿈이 무채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맘이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린 옆구리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오늘도, 아니 이 가을이 끝나도 글의 끝은 여전히 요원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