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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Sep 14. 2022

내갠 탁월한 재능이 있다

재밌거나 없거나 혹은 썰렁하거나

말과 글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겼을까. 당연히 말이 먼저 사용되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문자가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우린 쓰는 것보다 말하기가 자연스러워 자주 하고, 또 즐긴다. 그때 나누는 대화는 대충 3가지다. ‘재밌거나, 없거나 혹은 썰렁하거나’    


내겐 탁월한 재능이 있다. 한 여름 더위에도 내가 입을 여는 순간, 그곳을 시베리아 벌판으로 초토화시키는 재주. 어느 땐 말을 길게 하다 보면 그 벌판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듣던 사람들이 지난겨울 외투를 꺼내 입게 만드는 숨은 실력. 나는 내가 막 던지는 말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말하면 일종의 수사학(修辭學)이라고 '개뻥'을 친다.


내가 재미있다며 상대방에게 하는 말 중 하나.

옛날 어느 부자(富者)가 중병에 걸린 자신의 종을 의사에게 데리고 와, 치료를 부탁하면서 ‘이 환자를 치료해주면, 죽든 살든 큰돈을 주겠다.’라고 약속했다. 기대감에 가득 찬 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환자는 죽고 말았다. 약속 이행을 바라는 의사에게 부자가 물었다.

“의사 선생, 당신이 이 환자를 살렸소?”

... ... ... (살리지 못한 건 팩트다)

“아니며 당신이 죽였소?”

... ... ... (죽이지 않은 것도 팩트다)

그러자 부자는 “당신이 내 종을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았으니, 나는 돈을 줄 수 없소.”


재미는 덜하지만 무슨 개똥철학이라도 묻어 있는 착각을, 상대방이 느끼게끔 사기 치며 하는 말 중 또 다른 하나.

‘내가 하는 말은 모든 거짓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참일까, 거짓일까.

만약 이 말이 참이라고 하면, 내 말은 모두 거짓이므로 이 말은 거짓이 되고, 이 말이 거짓이라면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 아니므로 내가 하는 말은 다시 참이 된다. 만약 이 말이 거짓이라고 하면,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 아니므로,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참이고 또 내가 하는 말은 다시 거짓이 된다.


첫 번째 예, ‘부자와 의사 이야기’는 궤변(詭辯)이라고 한다.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오염된 논리 전개를 이용하는 추론의 일종이다. 궤변의 사전적 의미는 <형식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논증을 이용해서 거짓인 주장을 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논법>이다.


두 번째 예, ‘내가 하는 말은 ~’라는 명제는 일종의 패러독스(paradox)다. 패러독스를 사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을 말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궤변이든 패러독스든... 다음의 실례(實例)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재미라고는 쥐뿔도 없는 단지 ‘논리적 사고의 게으름’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을 들먹이며 멀쩡한 에어컨을 끄게 만드는 경우다. (그러니 어떤 모임에서라도, 심지어 가족한테도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하지 말기 바란다. 왕따를 자초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한국전쟁은 남침(南侵)일까 북침(北侵)일까?’ 우리들은 대부분 소싯적부터 남침이라고 배웠으니 남침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일까. 헷갈리면 팁 하나. 남쪽에서 부는 바람은 남풍(南風)이라고 하고, 북쪽에서 부는 바람은 북풍(北風)이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읽기로 멈추기 바란다. 다시 묻겠다. 한국 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북에서 쳐 내려왔으니 북침이 옳은 표현? 그동안 우리는 한국전쟁을 남침이라고 말해 왔는데... (머리 아프다)


남풍이 남쪽에서 부는 바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 남침을, 남쪽에서 침략한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남+풍>은 ‘명사와 명사’인 반면 <남+침>은 ‘명사와 서술어’ 관계라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즉 <침>은 타동사이기 때문에 [한국 전쟁은 남(쪽을) 침(략한)한 전쟁]이 맞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가 말해 왔던 표현이 옳다. (팁이 늘 좋은 건만은 아니다. 팁 때문에 낚긴 거다)  다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애매해서 그렇지... 하여튼 자신의 장수(長壽)를 생각한다면, 이 따위 질문이나 말은 생각도,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렇게 재미없는 정도를 넘어 썰렁한 말이나 하며 사는 내가, 오늘 새벽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8-2014)라는 남미(南美)의 작가가 쓴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소설을 완독 했다. 오래전에 읽기를 시도했다가 집어던진 책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만 해도 위에서 말한 남침, 북침보다 훨씬 더, 참, 심각하게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오롯이 <~ 고독>이라는 제목에 꽂혀 책장을 열었으나 등장인물의 풀네임(full-name)이 할아버지와 아들과 손자가 똑같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7대에 걸쳐 무수한 사건이 마콘도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아주 긴 장편소설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만나는 주인공들 이름의 혼동은, 이 소설에 비하면 양반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고, 죽은 이가 부활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권총으로 자살한 사람의 피가 온 마을을 적시고... 하는 궤변도 패러독스도 아닌 말 같지도 않은 과장된 표현에 황당하기만 해 읽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이런 걸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단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현실의 문제를 부각하는 것이다.


얼마 전 태풍 ‘힌남노’가 이 땅을 며칠간 노리고 할퀴던 그 며칠 동안 나는 그 황당한 책을  읽어 냈다. 주인공(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집안의 계보를 펼쳐 놓고 메모리 펜으로 줄 쳐 가면서... 읽다가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면, 이름이 같다 보니 할아버지가 그랬다는 건지, 아버지가 그랬다는 건지, 손자가... 바싹 정신 차리고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참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그동안 나는 ‘견지망월(見指亡月)의 우(禹)’를 범하고 있었던 거다. 스포일러를 할 생각도 없으니 내용이 궁금하면 읽어 보기를 권하지... ... ... 않는다. 살아가면서 ‘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10년 정도 아니 최소 1년 정도’의 고독이 없다면, 읽어 내기가 결코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까지 나는 또 한 권의 책을 읽어 낼 거다. 아직 뭘 읽어야 할지 정하진 않았지만...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도 썰렁하고 생각도 고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14호 태풍 난마돌이 꿈틀거린다는 9월의 중순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감포 바다 가라도 나가볼 생각이다. 거친 해풍으로 그 뭔가를 씻어내기 위해서. 꼭 그러고 싶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어내기 위해 이런 도표를 만들어 읽어야 그나마 헷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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