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의 신 유학자 정이(程頤)는 ‘인생에 있어 세 가지 불행’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돈 많은 부모를 만나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소년등과’, 즉 젊은 나이에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며 셋째는 재주도 운도 다 갖춘 것을 말한다.
아이러니하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이 세 가지는, 모든 젊은이들이 소망하는 것이건만 정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난을 겪지 않고 순탄하게 출세를 하면 세상을 우습게 보고 교만하여 정당한 절차와 노력을 하지 않아 도리어 불행해지기 쉽다고 말하고 있다.
재벌 2~3세의 갑 질이 도가 넘어섰을 때 또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년등과와 자신의 재주나 운을 믿고 설치다 법정에 드나드는 장면을 매스컴을 통해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잘 나가던 시절, 나는 새도 떨어트렸다는 그들이, 자신이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생각이나 해 봤을까? 그때마다 정이의 말에 수긍이 간다.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란 상태를 우리는 결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이가 말한 것으로부터의 결핍이 진정한 행복을 의미하는 걸까? 모닝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를 돌아보니, 나는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사람일까? 아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이 세 가지에 해당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다음을 해 낼 수 있는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즉 결핍은 불행이 아니라 동기부여다. 내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느린 걸음으로라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 된다. 급할 건 없다. 설사 내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만큼 앞으로 전진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벌써 가을 입구다.이제 며칠이면 추석이고 이 한해도 지고 말 것이다. 한 해를 둘러보니 작심 3일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냉철하게 맺고 끊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할 필요 없다. 비록 3일을 넘기지 못했지만 2일은 노력했으니 궤변 같지만 그것이면 충분(?)하다. 실패했으니 또 작심 3일 하면 된다. 그렇게 이 한해를 지낸다면 어떤 면에서는 또 다른 성공일 수도 있다.
요즘 영어공부에 적은 시간이나마 나름 할애하고 있다. 거실, 침실 침대, 차 안에 이런저런 영어자료들이 뒹굴고 있다. 한참 영어와 멀리했기에 단어들이 가물가물하지만 최근 자주 접하다 보니 기억이 새롭다. 어쩌다 아주 길고 전문용어가 수두룩한 어려운 영어문장을 접하게 되면 왜, 이렇게 귀찮고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자문하지만 이 ‘결핍의 보완’이 내게 힘을 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며칠 전 아침에 일어 나 비몽사몽하고 있는 데 핸드폰으로 낯선 문자가 날아왔다. < [Gyeongju] Safety first. Avoid visiting hometown...> 전날 저녁에 마신 술 때문에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영어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이제 경주 시에서 보내는 경고문도 영어로 보이는 군...) 그러나 그건 경주에 기거하는 내·외국인 모두에게 보내는 영어 경고문이었음을 그날 오후에서야 알았다. ㅠㅠㅠ
이렇게 결핍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그러려니’하면서 태만하게 살면 된다. 그러기 싫어 평소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내 삶을, 눈여겨 봐주던 신창석 교수가 그의 신간 <중세 여성 철학자 트리오> (일 조각/2021.01.30. 발간) 보내 준 적이 있었다. 신 교수 덕택에 [엘로이즈,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헬프타의 제르 트루다]를 지금도 가끔 들여다본다. 신 교수 아니면 내가 스스로 구입해 읽을 책이 아닌...
신 교수 때문에 (그의 학문적 자극으로)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 보겠다고 경주 중앙도서관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펼쳐보고 기겁하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때처럼 내 지력의 한계나 결핍이 날 절망케 한 적이 또 있었던가. 그날 이후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고 조금씩 그 결핍이, 나를 키우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결핍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