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나도는 우스갯소리다. 우스갯소리지만 찔리는 말이다. 어디 신곡뿐이겠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수백 년 동안 회자(膾炙)되고 있지만 여전히 제목 이외는 낯선 책들. 그 책들을 우린 고전(古典)이라 부른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 읽기.
최근 몇 권의 고전을 뒤적이면서 느끼는 것은 이 책들의 글(內容)이 우리들에게, 아니 내 삶에(사고와 행동) 있어 만만치 않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수험생 시절 제목과 저자 그리고 대강의 스토리만 (일부는 다이제스트 판으로 읽기도 했지만) 시험을 위해 알아야만 했던 책들을, 요즘 오리지널 번역본으로 읽으면서 긴 호흡(한숨이라고 해도 좋다)을 내쉬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단테의 신곡(총 3권. 민음사)은, 그 어린 시절 처음 서너 쪽을 읽다가 더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던 책이었기에 감회가 남다르다.
다른 고전과는 달리 이 책은 특히 당대(중세)의 사회적, 정치적 이슈, 그리스 로마 신화, 기독교적 세계관과 성경, 역사, 철학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읽기가 참 어렵다.
읽으면서 단테가 말하고 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모른 척 두리뭉실 넘기다, 내 얄팍한 지식의 민낯을 대면하고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러나 그나마 알고 있는 창호지 같은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또 책 뒤에 있는 각주를 참고 삼아 겨우겨우 읽고 있다. (하지만 단테가 신곡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당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알아야 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두 세줄 읽고 등장인물의 신원과 시대적 분위기를 알기 위해 각주를 줄 쳐가면서... 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아내가 툭 한마디 던졌다.
- 무슨 고시 공부해요?
-.........ㅠㅠㅠ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
지옥을 지나 연옥 반쯤 읽은 지금. 어떤 부분은 문자적으로 밖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계에 답답하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특히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도레가 그린 삽화들은 읽기에 도움이 됨)
선과 악, 죄와 벌, 신화와 현실, 정치와 종교, 문학과 철학 등등... 인간 삶의 모든 주제를 끌어안은 이 책을 쓴 단테를 가리켜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지구 위를 걸었던 사람들 가운데 그 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
T.S. 엘리엇 극찬도 이랬다.
-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
이들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기엔 내 지적 수준이 너무 얄팍해 첨언(添言)할 말이 없어 궁색하기만 요즘. 그래도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곧 다가 올 가을 전에 완독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蛇足>
중국 당나라의 문학자이며 사상가인 한유(韓愈·768~824).
그가 아들에게 독서를 권하기 위해지어 보낸 시,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서 가을은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가을은 등불을 가까이해 책을 읽을 만한 시절이라고 노래하면서부터였을까? 우리는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근데... 아니다. 가을에 방콕 하는 것은 (독서하든 뭘 하든) 이 아름다운 계절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다.
새빨간 치마처럼 산을 두른 단풍나무, 환상적인 터널을 이루는 은행나무, 황홀한 군무를 자랑하는 억새의 이 땅의 가을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혹 단테와의 만남이 마무리되지 않더라도, 나중에 다시 만나 마무리하더라도 나는 가을엔 책을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그땐 나는 들로 산으로 싸돌아 다닐 거다.
며칠 전 새벽 휴가 때 영덕 백악기 바위에서 바라본 일출이다. 역광이라 바위가 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가을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