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길을 홀로 걷다
나만의 경험이고 생각 혹은 착각일는지 모른다. 어떤 목적지를 찾아 가는데 처음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지만 나중에 돌아오는 그 길이 훨씬 짧게 느껴지는 경험. 왜일까. 그것은 낯섦과 익숙함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목적지로 향할 때는 낯섦에 이것저것 신경 쓰게 되지만(시간이 더 걸린다는 느낌을 받지만), 돌아올 때는 이미 그 길이 익숙해진 탓에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낯섦과 익숙함. 익숙하다는 것은 그것을 자주 보았고 잘 알고 편안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모아진 생각의 양만큼 익숙함의 크기를 얻게 된다. 예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요즘 나는 익숙해지면 익숙해진 만큼,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배제하려들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예측하지 못한 것들로부터 상처받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제 14호 태풍 남마돌의 북상함에 따라 바람이 벌써부터 요란을 떨고 있는 저녁 밤길을 홀로 걸었다. 동천동에서 황성동까지. 적은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일부러 길을 골라 다닌 것도 아닌데, 마주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좋았다. 익숙한 그 길을 마치 처음 걷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그곳에서 찢긴 내 그림자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낮에, 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반드시 그런 건만은 아니다. 어떤 것은 빛으로 가려져 있다가 한 꺼풀 빛을 벗겨야만 보이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밤에 더 선명하게 보인다. 밤길을 걸으며 이곳에 이런 찻집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저기에 저런 꽃집이 있는 줄 낮에는 보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이상하게도 낮에는 안 보이다가 밤에 더 잘 보인다.
뚜벅뚜벅 길을 걸으면 상실이 일상화되어버린 요즘을 돌이켜 본다. 상실의 형태는 다양하다. 언젠가는 부모형제를 잃고 가슴 아파할 것이다. 상실은 사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혼, 이별, 절교 등 잊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잊힘에도 기억 자체가 소멸해버리는 완전 망각이 있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뇌의 어느 곳에 저장돼 밖으로 인출되지 않는 유실 망각이 있다. 어느 것이든 상실은 슬픈 일이다.
홀로 길을 걸을 때 집중하는 게 있다. 그 길의 색깔에, 향기에, 소리에 집중하는 거다. 엿보는 거다. 어둠의 길은 색깔이 없는 것 같지만 샤갈의 <한밤중>이라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둠 속에도 수많은 색깔이 존재한다. 노란 달과 하얀 눈, 그 사이를 떠도는 흰 실루엣의 사물들, 가운데 놓인 전등과, 주변을 밝혔다가 점점 사그라지는 빛의 그라데이션이 있어서 바탕색인 어둠이 어둠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둠은 더욱 많아지는 것 같다. 어둠은 사유, 고뇌, 외로움, 불안, 절망, 낯섦 등 삶의 아픔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것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절망의 병은 치유받아야 한다. 부정하고 잊으려 하고 저항하면 할수록 상처만 더 도진다. 설사 그 아픔이 아문다 해도 또 생각하지 못한 일이 다가오고 그 고비를 넘기면 또... 우리는 아니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가 보다.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두려운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내 삶이, 격한 변화에 응하지 못하고 녹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녹이 끝내는 나를 무너뜨릴 것 같아 힘들다.
그 길 위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우니 걷기도 버거웠다. 가던 길을 잠시 멈췄다. 밤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신발 끈을 다시 단단히 매고 허리를 펴고 당당히 걸어 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밤에 내리는 빗물 따위는 말고, 신 새벽 그 이슬을 받아다 내 영혼에 낀 녹을 닦아낼 용기가 아직 있나? 그리고도 남는 이슬은 내 가슴속 자그마한 연못에 단 몇 방울이라도 담아 두고, 닫힌 문이 열리지 않아 녹이 꼈을 때, 징징거리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살아 있나?
<어느 해 가을. 경주 황복사지 3층 석탑 인근에서 조우한 한쌍의 커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