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
<쥐뿔, 개뻥>이라는 말이 있다. 둘 다 격이 낮고 속된 일종의 비속어다. 이 나이 먹도록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간에 이런 비속어와 친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산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그것은 말하는 이의 품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는 게 별로 없는 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만이라도 지켜보자는 생각에 늘 스스로를 살피며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내가, 이 쥐뿔과 개뻥을 너무 자주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쥐뿔’이라는 말은 쥐의 거시기에서 유래되어 지금의 형태로 변형된 말로, 아무 보잘것이 없거나 규모가 작은 것을 비유로 말할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쥐뿔도 모른다.”라는 말의 의미는 “아무것도 혹은 거의 모른다.”라는 말을 뜻한다.
개뻥이라는 단어를 소개(?) 받은 건 한효주라는 여배우 때문이다. 영화 <감시자들>에서 신참 엘리트 수사요원 역을 맡은 한효주가 직장 상사인 설경구의 허풍 낀 수사 무용담을 듣고서는, 기가 막힌다는 듯, "개-뻥"이라고 소리친다. 영화에서 그녀의 격(?)에 안 맞는 개뻥 소리를 듣고, 그 언밸런스에 나는 혼자 많이 웃었다. 그때부터 상대의 말을 듣다가 시답지 않거나 거품이 끼면 나는 개뻥을 던지며 상대를 무안케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애용하다 보니 개뻥이라는 용어는, 한효주와 달리 내 격에는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 이 말을 이렇게 입에 달고 다니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내 성향과 얼추 일치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진담 반 농담 반 (쥐뿔... 개뻥)을 시도 때도 없이 뿌리고 다닌다. 뿌린다는 표현을 쓴 건, 그만큼 빈번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책을 읽다가 이번엔 상대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쥐뿔이라고 말하며 머리숱 귀한지 모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적이 있었다.
“분노나 욕망으로 인한 것을 비자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 옳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옳지 않은 이유는... 이 주장은 어느 쪽을 말하는 것인가? 욕망과 분노로 인해 행하는 것들 중 우리는 어느 것도 자발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것들 중에서 고귀한 것은 자발적으로 행하지만, 부끄러운 것을 비자발적으로 행한다는 것인가? 원인이 하나인데 이것은 우습지 않은가?” (3권 1장 중에서)
지금부터 2천3백여 년 전인 BC 3백여 년 경에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들 앞에서 강연한 것을 아들 니코마코스가 받아 적어(?) 엮은 책의 내용 일부다. 그 책을 사람들은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지막 문장에서 묻는다. “우습지 않은가?”라고.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더 읽어 본다. 쥐뿔도 우습지 않다. 뭐가 우습다는 건지, 왜 우습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뭔 말인지도 알쏭달쏭하다.
어떤 이는 저 책을 그대로 필사해 보면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마치 조정래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신의 작품을 필사토록 권유한 것처럼. 그러나 조 작가의 소설들은 재미라도 있지... 과연 그런 식으로 하면 이해가 될까? 나는 자신이 없어 그 방법은 포기했다. 대신 문장의 곁가지 치고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당신이 쏟아 낸) 분노와 욕망이 자기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면서도 고귀한 일은 자기 뜻에서 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건... 어찌 되었든 둘 다 한 원인(당신)에서 나와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니깐, 아니라고 우기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러니 우습지 않은가?
(그래도 내 지력(知力)을 되돌아보니... 쥐뿔이다)
이 책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혹 번역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번역한 강상진(서울대 철학과) 교수에게, 특강이 시작되기 전에 물었다. 그가 강의 때 답했다. 그리스 원문에 충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지적으로 난쟁이인 우리가(아니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인의 무릎 근처에도 못 가서 그렇다는 거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에서 움베르토 에코도 이런 유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난쟁이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론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라고.
강 교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굳이 거인의 어깨에 올라갈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살면 사는 게 편하다. 그런데 고생스럽게 거인의 어깨에 올라 가, 삶을 더 멀리 보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면... 참, 올라섰더라도 거인의 시선과 같은 곳을 봐라 봐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우리에게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 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 드는 몰입’이다. 우리의 본성은 반(半) 제품이다. 우리는 부단히 후천적 노력과 습관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나야 가 한다.” 2시간 가까이 강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몰입과 행복이라... 강상진 교수의 말이 개뻥은 아닌 것 같은데, 문제는 내 지적 능력이 쥐뿔이군...)
<뉴턴도 이런 말을.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